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우렴(友濂). 여광주(呂光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선장(呂善長)이고, 아버지는 여춘영(呂春永)이다. 어머니는 임박(任璞)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99년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이듬해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1802년(순조 2)에 수찬(修撰)이 되어, 무관 인사에 편파적이고 또 왕을 시위하는 데 실수가 있었음을 들어, 병조판서 이병정(李秉鼎)을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파직당하였다.
다시 기용되어 부응교(副應敎)·응교·사인(舍人) 등을 거쳐 1807년 집의(執義)에 올라, 정조의 묘정에 배향된 김종수(金鍾秀)의 출향(黜享)과 추탈관작(追奪官爵)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경상우도암행어사로 다녀와 그 탐학상을 들어, 전통제사 이당(李溏), 의령현감 박종구(朴宗球) 등 전·현직수령 15명에 대하여 치죄할 것과 정치를 잘한 수령[善治守令]으로 함양군수 남주헌(南周獻)에게 포상할 것을 청하였다.
또 그 해 응교로서 황해도 장산(長山) 이북 11고을의 세곡을 돈[錢]으로 대납하게 할 것을 청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20년에 대사간, 1822년에 이조참의, 1826년에 동지의금부사, 1827년에 다시 대사간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829년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유관참(楡關站)에서 객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