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병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외직에서 돌아와 호조참의·대사간·좌부승지 등을 거쳐, 북도(北道)를 자세히 살펴 규찰했으며, 1678년(숙종 4) 강릉부사에서 예조판서로 특진, 발탁되었다. 1680년 조정에서 보사공신(保社功臣)을 추가로 선정할 때, 공정하지 못한 공신 추록은 여론의 의혹을 더욱 살 것이며, 이사명(李師命)·신범화(申範華) 등의 봉군(封君)을 환수하고 김석익(金錫翼)의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으로 올려줌)도 개정해야 한다고 반대 상소를 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좌천되었다.
이듬해 앞서 현종의 국상(國喪) 때 도감(都監)에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의금부사·좌찬성을 역임한 뒤 1684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정가에서 분경(奔競)과 뇌물이 심하자 이를 근절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1688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 해에 왕이 동평군(東平君)을 지나치게 총애하자 박세채(朴世采)와 남구만(南九萬)이 간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유배되었다. 여성제는 이 사건을 구해(救解: 도와서 화해시킴)하려다가 경원으로 정배되었다. 그 뒤 곧 용서되어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며, 1689년 좌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여성제는 소론으로, 당시 집권층인 남인과의 의견 충돌로 세 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이 때 남인들이 성혼(成渾)·이이(李珥)를 문묘에서 출향(黜享: 배향한 위패를 거둬들임)하려 하자 부당함을 진소(陳疏)하였다.
또한 앞서 성혼·이이의 배향시에 춘관(春官: 예조)의 관리로서 관계되었다고 해서 죄를 얻어 양강(楊江)으로 귀향가서 풀려났다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 소식을 듣고 상경해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 때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은 극간하다가 죽고, 여성제와 이상진(李尙眞)만이 끝까지 상소하였다. 이 일이 허사가 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울분으로 1691년 8월에 죽었다. 저서로는 『운포집』이 있다.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청선고(淸選考)』
- 『서파집(西坡集)』
- 『약천집(藥泉集)』
- 『명곡집(明谷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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