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봉리의 북쪽과 하석리 서쪽의 학소리와 접하고 있어 이 3개 마을의 중간지점에 유적이 위치하며, 경작된 논밭에서 유물이 채집되고 있다.
시굴조사를 통하여 유적의 성격이 부분적이나마 밝혀지게 되었다. 너비 1.5m, 길이 3m의 규모로 세 곳에 구덩이를 파 시굴조사를 한 결과, 한 곳에서는 지표 아래 15㎝ 깊이에서 지름 50㎝ 규모의 원형으로 된 불탄 자리가 확인되어 화덕자리[爐址]로 여겨졌으나 경사면의 심한 파괴로 유구의 전체 윤곽을 알 수 없었다.
다른 한 곳에서는 지표 아래 120㎝ 깊이까지 계속되는 두꺼운 문화층이었으나 뚜렷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마지막 한 곳에서는 가마터[窯址] 비슷한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지표 아래 30㎝ 깊이에서 남북으로 길게 마련된 두줄의 벽 시설이 확인되었고, 벽 사이의 평균 너비는 80㎝였으며 진흙을 발라 마련한 벽의 두께는 평균 5㎝였다.
벽의 안쪽은 불에 몹시 그을렸고, 벽은 지표 아래 110㎝까지 계속되었다. 바닥 역시 불에 탄 진흙바닥으로 5㎝ 두께의 재층으로 덮여 있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재층에서 주로 토기편이 수습되었는데, 이와 같은 시설물은 토기를 굽던 가마터로 여겨진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주로 띠손잡이[帶狀把手]가 달린 토기편과 시루의 바닥편이 많다.
토기의 질은 석면 가루가 많이 섞인 갈색 간토기[磨硏土器], 모래가 많이 섞이고 높은 온도에서 구워진 회갈색토기, 물레[轆轤]를 사용하여 만든 회색토기 등이었는데, 이로 미루어 이 유적은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