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5호. 비신 높이 2.9m, 너비 1.56m. 고려 천태종의 개조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귀부(龜趺)와 옥개석(屋蓋石)을 갖추고 있다. 귀부는 둔중한 편으로 용두형이며 등에 낮은 비좌가 있다.
비신 앞면 상단에는 ‘贈諡大覺國師碑銘(증시대각국사비명)’이라는 제액이 4행 행2자씩 전서로 음각되어 있고, 그 좌우에 봉황과 보상화문을 양각하였으며 비면의 가장자리에도 보상화문대를 양각하였다. 옥개석의 처마에는 네모진 서까래를 모각하였다.
의천은 고려 문종의 아들로 11세에 경덕왕사(景德王師)난원(爛圓)을 따라 영통사에 머무르면서 화엄의 교관(敎官)을 배웠다. 비문에는 어린 시절부터 불가에 들어간 뒤 송나라에서 천태 · 화엄 양종의 깊은 뜻을 배우고 귀국하여 해동의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 그의 일대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1101년(숙종 6) 10월 국사에 책봉되고 같은 달 5일 입적하여 대각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비는 그가 입적한 뒤 1125년(인종 3)에 세워졌다.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김부식(金富軾)이 지었으며, 글씨는 오언후(吳彦侯)가 썼다. 고려 전기에 유행하던 구양순풍의 해서로서 대표적인 명품이다.
한편, 비의 뒷면 음기(陰記)에는 앞쪽에 대각국사의 묘실과 비명을 안립한 사적기를 쓰고, 이어서 문도들의 이름 · 직명 등을 새겼다. 전자는 문하승 영근(英僅)이, 후자는 문하승 혜소(慧素)가 모두 해서로 썼는데, 특히 혜소의 글씨는 절정기에 이른 명품이다.
탄연(坦然) · 혜관(慧觀) 등과 함께 당시 고려 중기의 서풍혁신에 큰 역할을 한 서가라 하겠다. 이밖에도 대각국사의 사적을 살필 수 있는 석문(石文)으로 「흥왕사대각화상묘지(興王寺大覺和尙墓誌)」 ·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