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룡사 법경대사 보조혜광탑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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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오룡사 법경대사비 정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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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북한 국가지정문화재국보급 제153호.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에 있는 고려전기 에 건립된 승려 법경대사 경유(慶猷, 871-921)의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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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국가지정문화재국보급 제153호.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에 있는 고려전기 에 건립된 승려 법경대사 경유(慶猷, 871-921)의 탑비.
내용

전체높이 3.7m, 비신높이 2.08m, 너비 1.01m, 두께 21㎝.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승 법경의 탑비로 944년(혜종 1)에 건립되었다. 이수(螭首)·비신·귀부(龜趺)를 모두 갖추었는데, 이수·비신은 능만암(稜蠻岩)이며 귀부는 화강암이다.

이수에는 4마리의 용이 서려 있는데 전면 오른쪽 용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었다. 이수 뒷면 가운데에는 ‘五龍之寺’라는 제액(題額)을 해서로 양각하였다. 비신에는 비문 이외에 아무런 장식문양이 없다. 귀부는 머리를 곧게 세운 용맹스러운 모습이며, 등에 새긴 귀갑문은 이수의 용 조각과 함께 뛰어난 수법이다. 귀갑문의 뒷부분에는 卍자가 두 곳에 새겨져 있다.

비문에 의하면 법경 대사는 속성이 장씨(張氏)로, 이미 15세에 출가할 것을 뜻하다가 888년(진성여왕 2) 근도사(近度寺)영숭율사(靈崇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당나라에 들어가 도응화상(道膺和尙)을 사사하여 크게 깨달은 바 있었다. 908년(효공왕 12)에 귀국하였으며, 고려태조는 그를 왕사로 모셨다.

921년(태조 4) 3월 오룡사법당에서 입적하니 이듬해 정월 신좌(神座)를 근처 용암산(踊巖山)의 동쪽 봉우리에 옮겼다 한다. 태조는 법경이라는 시호와 보조혜광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비음(碑陰)에는 대사의 승속(僧俗) 제자들의 성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 가운데 신성대왕(神聖大王 : 고려 태조)과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신 최언위(崔彦撝)가 들어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자는 모두 불명이나 대략 최언위가 지었으리라 추정하며,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글씨를 석선경(釋禪扃)이 썼다고 하였다. 전면은 해서이며 뒷면은 행서이다.

참고문헌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上)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1916)
『朝鮮金石攷』(葛城末冶, 東京 國書刊行會, 1935)
집필자
김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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