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과 북쪽은 벽성군, 서북쪽은 장연군, 남서쪽은 황해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4°36'∼126°32', 북위 36°55'∼38°58'에 위치한다. 면적은 172.07㎢이고, 인구는 2만 96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7개 면, 75개 행정리(26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에 있다.
백령도(白翎島)·대청도(大靑島)·연평도(延坪島)·덕적도(德積島)·영흥도(靈興島) 등 25개의 유인도(有人島)와 75개의 무인도(無人島)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섬들은 산세가 험하여 산지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대청도의 삼각산, 선갑도의 선갑산·덕적도의 국수봉 등은 300m가 넘는 봉우리들이며, 이외에는 200m가 넘지 않는 산들이 여러 섬에 산재해 있다. 계곡과 해안에만 평지가 매우 좁게 형성되어 있는데, 계곡을 흐르는 하천의 유로가 짧아 넓은 평야를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영흥도·백령도 등 큰 섬의 해안에는 갯벌을 매립한 간척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어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다. 이 간석지는 경기도와 인천광역시 전면의 서해안 일대에서 매우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해수의 영향을 덜 받는 내륙의 간석지에는 염생습지(salt marsh)가 발달되어 있기도 하다.
간석지의 배후에는 바람에 의해 운반되어 온 풍성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해안사구는 덕적도의 서포리해안, 대청도의 북안, 영흥도의 북서부, 용유도의 서남안, 무의도의 동안 등 곳곳에 산재해 있다.
기반암은 대부분 편암 및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며, 반상변정질 편마암과 석영편암도 나타난다. 주변해역은 평균 수심이 44m에 불과한 대륙붕으로 이어져 있어 어장으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도 심해 갯벌이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양식업과 천일제염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최근 갯벌 매립이 활발하여 위축되고 있다. 평균조차는 6.2∼6.5m이며, 최대조차는 11m 이상으로서 용유도 부근에서 나타난다. 일부 섬에는 독특한 해안지형인 해식애가 형성되어 있다.
바다의 영향으로 기후는 온화하여 최한월(最寒月) 평균기온이 -1.7℃, 최난월(最暖月) 평균기온이 25.7℃, 연평균기온 11.7℃이며, 연강수량은 1,090㎜이다. 청천일수(晴天日數)는 연평균 100일 정도이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굴된 바는 없으나 황해 도서지역에 신석기시대 유적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또 황해도지역에 우리나라 최초의 부족국가 중의 하나인 진번(眞番)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이 정복되고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될 때 이 지역에는 진번군이 설치되었는데, 진번군이 없어진 다음 낙랑군·대방군 등에 예속되었다가 고구려의 판도내에 들어갔다. 고구려시대에는 이곳이 옹천(甕遷)이라 불렸고 지금의 강령(康翎)은 부진이(付珍伊), 백령도는 곡도(鵠島)라 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폭지군(瀑池郡)에 소속되었다. 지금의 덕적도는 원래 이름이 덕물도(德勿島)로서 중국과 통교하는 해상교통의 중간거점이었다.
중국과 교통하는 항로에는 인천방면에서 덕적도를 거쳐 중국의 산동반도에 도달하는 동로(東路)와 흑산도를 거쳐 강남의 명주(明州)에 도달하는 남로(南路, 또는 明州航路)가 있었는데, 거리가 가깝고도 안전한 동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덕적도는 이 동로의 중간거점으로서 중국과의 통교에 이바지한 바가 많았다.
삼국통일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덕적도에 와서 40일간 머물러 있었는데, 이 때 신라에서는 태자 법민(法敏)이 병선 100여 척을 이끌고 이 곳으로 가서 소정방과 백제를 공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돌아왔다. 덕적군도에 속해 있는 소야도(蘇爺島)는 소정방이 머물렀던 섬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40년(태조 23)옹진(甕津)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 현령이 두어졌다. 부진이는 940년영강(永康)으로 개칭되었고 옹진의 속현이 되었다가 1106년(예종 1) 감무가 파견되었다. 곡도는 940년백령도로 개칭되었다.
1018년백령도에 진이 설치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혁파되었고 직촌(直村)이 되었다. 이 백령도에는 대청도와 소청도가 속해 있었는데 대청도는 고려시대의 유배지로 유명하였다.
1397년(태조 6)옹진현에 진이 설치되고 병마사로 하여금 현령을 겸임하게 하더니 1423년(세종 5) 첨절제사로 바뀌고, 뒤에 다시 현령으로 복구되었다. 옹진현에는 수군첨절제영인 소강진(所江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1719년(숙종 45) 황해도수영으로 승격되어 수군절도사가 설치되는 한편, 옹진현이 도호부로 승격되어 수군절도사가 옹진부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영강현과 백령도는 1428년(세종 10) 합쳐져 강령현으로 되었다. 강령현은 1637년(인조 15) 혁파되어 해주에 합속되었다가 곧 복구되었고, 1653년(효종 4)옹진에 합속되었다가 10년 뒤에 복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 옹진현과 강령현의 호구는 총 716호 2,053인이었다.
1895년해주부 옹진군과 강령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896년황해도로 이속되었다. 1909년강령군이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주군의 일부가 옹진군에 편입되었으며 백령도는 장연군에 편입되었다.
1945년 11개 면 중 가천면과 교정면의 대부분이 38도선 이북에 속하게 되었고 대신 38도선 이남의 벽성군 일부지역과 장연군의 백령도가 편입되었으며, 이때부터 황해도에 속했던 옹진군이 경기도의 관할이 되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성립됨에 따라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소연평도 등 도서지역을 제외한 육지의 전 지역이 휴전선 이북에 위치하여 미수복지구로 되었다. 1962년 6월 14일백령면 대청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부천군이 폐지됨에 따라 영종면·북도면·용유면·덕적면·영흥면·대부면 등 도서 6개 면이 편입되어 옹진군은 섬으로만 구성된 군이 되었다.
1974년 7월 1일대청도와 소청도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대청면이 신설되었고, 1975년 5월 20일대청면 소청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83년 2월 15일영흥면 자월리·이작리와 덕적면 승봉리가 통합되어 자월면이 신설되었다.
1989년 1월 1일 경계조정으로 영종면과 용유면이 인천직할시에 편입되었으며, 1994년 12월 26일에는 대부면이 경기도 안산시에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1일 군 전체가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9년 7월 20일에 송림면이 연평면으로 개칭되었다. 2005년 현재 옹진군에는 유인도 24개와 무인도 76개 등 모두 100여 개의 섬이 있으며, 이들은 북도면, 연평면, 대청면, 자월면, 백령면, 덕적면, 영흥면 등 7개의 면에 편입되어 있다.
1953년 휴전협정으로 본토지역이 미수복지구로 남게 되고 일부 도서지역만으로 군을 유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유물·유적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백령면 진촌리에는 패총이 있다.
연평면 연평리에 임경업(林慶業)을 모신 충민사(忠愍祠)가 있다. 병자호란 후 임경업이 명나라와 내통하여 청나라를 치려다가 일이 탄로되어 명나라로 피신할 때 연평도에 머무르면서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는데, 이때 선원들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가시나무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였다고 하는데, 그 뒤 주민들이 임경업의 선견지명을 기리기 위해 이 사당을 건립하고 그의 시호를 따서 사당 이름을 삼아 봄마다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었다고 한다.
옹진 백령도 사곶 사빈(천연기념물, 1997년 지정)·백령도 남포리 콩돌해안(천연기념물, 1997년 지정)이 있고, 옹진 백령도 진촌리 맨틀포획암 분포지(천연기념물, 1997년 지정)가 있으며, 특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옹진 대청도 동백나무 자생북한지(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와 북도면 장봉리의 신도노랑부리백로 및 괭이갈매기 번식지(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는 유명하다.
덕적면 진리에 3·1운동기념비가 있고, 백령면 진촌리에는 반공유격전적비가 있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로 조선시대까지는 뚜렷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따라서 최초의 교육기관은 1921년대청면에 세워진 대청초등학교이며, 그 뒤 각 면마다 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여 1922년대부면에 대부초등학교가, 1933년덕적면에 덕적초등학교와 대부면에 풍도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1934년영흥면에 영흥초등학교가 세워졌고, 1935년송림면에 송림초등학교가 세워졌다. 그 뒤 각급 학교들이 설립되어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5개교, 고등학교 5개교가 있다.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배연신굿을 들 수 있다. 배연신굿은 배의 수호신을 받들고 영(靈)을 맞이하는 풍어굿의 일종으로, 굿을 거행할 때는 으레 이 고장의 해신(海神)격인 임경업장군을 함께 받든다.
원래 이 굿은 옹진반도지방과 서해안 도서지방에 전래되어오던 것인데 6·25사변 이후 한때 사라졌지만 옹진에서 피난온 이 굿의 전승보유자 김금화(金錦花)에 의해 재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배영신굿은 경우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 음력 정월·3월·9월·10월로 나누어서 행하며, 목욕재계를 하는 등의 엄격한 금기사항을 지킨 다음에 거행한다. 굿은 신청올림·당산맞이·부정풀이·초부정과 초잠홍·영정물림·소당제석·먼산장군거리·대감놀이굿·영산할아범과 할멈굿·쑹기준다·다리발용신굿·강변놀이굿 등 12거리 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굿을 할 때는 배에 성황기를 비롯하여 장군기·소당기·오색기·봉죽·설이화 등의 깃대를 앞세우고 모두 25∼30명 가량이 어우러져 풍물을 치며 놀이를 벌인다.
이 때 풍물과 함께 「뱃치기」(뱃노래)를 부르며, 남편을 바다에 내보낸 아낙네들은 남편의 건강과 아무 사고 없이 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니나나타령」을 부르면서 춤을 춘다. 노래를 부를 때는 물이 가득 담긴 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물장구를 치면서 장단을 맞춘다.
연평면 연평리 뒷산에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당집이 있고, 조선 인조 때 의주부윤이었던 임경업을 모신 사당 충민사도 이 곳에 있어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길일을 택하여 연평도풍어제를 거행한다.
제물로는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며 시루떡 등의 음식을 진설하여 놓고 엄격한 관례에 따라서 제례가 집행된다. 제는 으레 당할머니가 있어서 모든 것을 주관하지만 제관은 그때 그때 따로 선출한다.
제를 지내는 목적은 마을의 안녕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려는 데도 있지만 도서지방이라는 특수한 여건 때문에 배의 무사함과 풍어를 기원하는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제가 끝나면 무당들의 12거리 굿으로 이어지고 마을은 축제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이 풍어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중단된 일이 없어 마을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의 생활은 많은 부분 바다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설화의 배경으로 바다를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고장에 전승되고 있는 설화는 지명유래담이 많고, 임경업·이성계(李成桂)·도선대사(道詵大師)·무학대사(無學大師)·유성룡(柳成龍)·강감찬(姜邯贊) 등이 등장하는 인물전설이 있다. 이 밖에 효행전설·아기장수설화·고수레유래담·도깨비이야기 등이 널리 전해지고 있다.
지명유래담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낸 출발점이 덕적도였다. 이곳에서 출발한 배는 당나라 서울 장안까지 왕래하였다 한다.
나당연합군을 편성하기 위해 당나라의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덕적면 소야리에 들어왔으며, 신라왕은 왕세자 법민에게 14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덕적도로 나아가 소정방과 연합하도록 하였다. 소야리는 소정방이 도래한 곳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임경업에 얽힌 일화가 이 지역에 널리 전하고 있는데, 임경업이 배를 타고 연평도 옆을 지나갈 때의 이야기이다. 같은 배를 탄 선원들이 식량이 다 떨어졌다고 하자, 임경업은 연평도에서 보리수 가지를 꺾어다가 그 잎사귀를 뿌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잎사귀가 모두 조기로 변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에서는 풍어제를 지낼 때 임경업장군을 모시고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이 밖에 백제의 수호신이었던 용을 나당연합군이 잡았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용바위전설」, 동네 부녀자들을 바람나게 한다는 「갓쓴비석전설」, 장수가 손으로 짚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장수바위전설」, 단종이 영월로 유배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백령도에 정착한 어떤 선비가 꿈에서 계시를 얻어 평양까지 가서 가져다 심었다는 「진촌리느티나무전설」 등이 있다.
구비전승되는 노래로는 「뱃노래」·「방아소리」·「시집살이노래」, 그리고 타령요 등이 있다.「뱃노래」가 많은 것은 이 고장 사람들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바다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며, 타령요가 많은 것은 경기도지방의 일반적 특징이다.
덕적도에는 인근의 사정을 소재로 한 「아리랑」이 불리고 있는데, “덕적산 넓이는 사방오리/그너머 동리는 여덟일세/문갑소야리 승황빼알/굴업울도 못섬일세/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와 같다.
「뱃노래」는 가락이 단조롭고 구성지며, 후렴은 노를 젓는 데 힘을 돋우는 것이기 때문에 힘차다. 가사의 내용은 거친 파도와 싸우며 고기를 잡는 모습과 고기를 많이 잡아서 즐겁게 살아보자는 소망 등을 담고 있다.
“……암해 수로를 맛마쳐 노니 밋띄 미암이 신작로로다 지화자 좋다/에헤 이에와요 이어차디요/달둘러 이마도 바다로 조기 잡으러 가자/연평 칠산 다 뒤져 먹고 어영도 바다로 돈 실러가세…….”
「방아소리」는 김매기할 때 경기도지방에서 널리 불리는 노래인데 방아찧을 때도 불린다. 김매기에 「방아타령」·「방아호」·「방호」·「방개소리」와 같이 「방아소리」계통의 소리를 널리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중남부지방에서는 「상사소리」를 널리 부르고 또 「에헤요」·「어후양」·「아용」과 같이 「에헤야」계통 소리를 부른다.
이 고장에서는 “……에헤 에라 방호/에헤 에라 방호/뻘구당 쿵쿵 열듯이…… 얼럴럴 상사디여/일락서산에 해는 지고/…….”와 같이 부른다.
「시집살이노래」는 “시집간지 삼일만에 놋덩어리 하나를 깨뜨렸네/시어머니 알으시면 노발대발 어이하나/시어머니 나오신다 시어머니 나오신다/아가아가 며늘아가 너의집에를 가거들랑/앞뒤전답 다팔아가지구 놋덩이 하나를 사오너라/아이구어머님 그말씀마오…….”와 같다.
그 밖에 「노랫가락」·「초한가」·「산염불」 및 시조창으로 부르는 「친구가」 등이 불리고 있다.
도서지역인 관계로 수산업이 발달되어 있으나, 대부분 반농반어의 특성을 보이고 있어 상대적으로 농업생산에 비해 그 비중이 약하다. 또한, 수산업 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으나 덕적도와 영흥도 인근 어장에서는 꽃게·새우·민어·피조개 등과 대청도·연평도 등 서해5도 일대에서는 조기·홍어·까나리·우럭·복어·꽃게 등이 어획되고 있다.
특히, 연평도 근해의 조기어장은 예로부터 유명한데, 1967년에는 약 5만 톤이 어획되는 등 3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주항인 연평항에는 4∼6월이 되면 우리나라 전역에서 어부와 상인들을 태운 어선들이 몰려들어 ‘조기파시(波市)’가 형성되었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어족의 고갈로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꽃게의 경우 현재에도 이 지역의 특산물로서 자리 잡고 있으며, 많은 양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이 외에도 굴·바지락·김 양식도 이루어져 어민 소득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서해바다의 특성을 살려 천일제염도 과거에는 활발했으나 현재에는 염전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농업은 산지가 많아 경지율은 낮지만 토지가 비옥하여 쌀·맥류·서류·채소류 등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고 있으며, 산지에서도 밤·대추·도토리·표고버섯과 각종 약초류 등이 채취되고 있다.
임야의 면적은 123.52㎢이고, 총경지면적은 28.54㎢로서 경지가 총면적의 17.4%를 차지하며, 경지면적 중 논과 밭의 비율은 각각 42%, 58%로 밭의 비중이 높다. 가축은 산양·염소·토끼 등을 사육하는 축산업도 소규모로 행해지고 있다.
광산도 비교적 활발하여 23개소의 광산에서 철·규석·석회석 등의 광물이 채굴되어 왔으나 2007년 이후 생산되지 않고 있다.
상업활동은 인구수가 작아 자체적인 발달이 미약하다. 그러나 포구를 중심으로 소규모 상점이 있을 뿐, 대부분은 인천에 의존하고 있다. 백령면의 진촌장은 이 지역의 유일한 시장이다.
교통은 인천과의 해상교통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나 군내 도서들간의 자체 연결망은 미약하고 따라서 각 도서내 육상교통망의 발달도 미약한 실정이다. 인천∼백령도간에는 쾌속선이 운항 중에 있으며, 이외에도 주요 도서인 연평도·대청도·소청도·영흥도·덕적도·자월도·북도 등으로 인천 연안부두에서 출항하는 정기여객선과 행정선이 운항되고 있다.
곳곳에 피서관광지를 이루는 여러 해수욕장들이 산재해 있는데, 여러 해안 지역에 기암괴석과 희귀한 식생 등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덕적면 서포리 해수욕장은 1.5km에 이르는 넓은 백사장과 노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북도면 시도리에 해수욕장이 있으며, 영흥도·자월도에도 해수욕장이 개장되어 있다.
수도권에 인접한 이 곳 해수욕장들은 해상교통의 발달로 인해 최근에 들어 여름 피서지로서 뿐만 아니라 바다낚시터로서도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서해의 해금강으로 알려진 백령도 두무진(頭武津)의 해안절경과 넓은 모래사장도 유명하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아름다운 빛깔의 콩돌이 모여 있는 콩돌해안과 단단한 모래로 이루어진 사곶천연비행장 등이 볼거리이다. 백령면 진촌리에는 반공유격전적비, 무명용사전적비 등 한국전쟁과 관련된 각종 기념물이 있다.
특히 1992년부터 인천과의 사이에 대형괘속선이 운항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두무진에서는 눈앞에 바라보이는 장산곶과 함께 심청이가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도 있다. 대청도와 소청도 해안의 암석경관도 뛰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도 있다.
군의 북서부, 황해도 옹진반도 서쪽에 위치한 면. 면적 15.60㎢, 인구 1,65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청리이다.
본래 장연군 백령면 지역으로 황해도 장연군에 속해 있었으나 1945년 위도상 38도선 이남에 위치하여 남한에 속하게 되면서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 등 2개의 유인도와 1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각각 대청리와 소청리로 분리, 관할되었다. 1974년백령면에서 분리되어 대청면이 되었다.
중남부에는 삼각산(三角山, 343m)이 솟아 있어 대부분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안에 인접하여 좁은 평지가 있다. 구릉지에는 주로 맥류와 서류 등 밭작물이 재배되며 해안평지에는 벼농사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수산물로는 해조류와 조기·홍어·복어·가자미 등이 어획되고 있다.
교통은 인천의 연안부두로 이어지는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대청도는 동백나무의 북한계로 대청리 일대의 동백나무군락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청(大靑) 1∼7리·소청(小靑) 1∼2리 등 9개 행정리가 있다.
군의 남부, 경기만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6.61㎢, 인구 2,04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진리이다.
본래 남양도호부 지역으로 덕적도라 했는데 1486년(성종 17)에 인천부로 옮겨져 덕적면이 되어 진리·울도·익포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부천군으로 편입되었고, 1973년에는 부천군이 없어지면서 옹진군으로 속하였다. 덕적도(德積島)·소야도(蘇爺島)·문갑도(文甲島)·백아도(白牙島)·울도(蔚島)·굴업도(掘業島)·선미도(善尾島) 등 8개의 유인도와 33개의 무인도 등 모두 41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북서부에는 국수봉(國壽峰: 일명 國師峰, 314m)이 솟아 있으며, 남동부에 비조봉(飛鳥峰)이 이어져 있어 산세가 험하다. 땅이 척박하고 경지가 적어 농업의 발달에 불리하나, 구릉지 사이와 해안에 펼쳐진 좁은 농경지에서 쌀·맥류·서류 등의 농산물이 생산되며, 산세가 험하여 임야가 많이 조성되어 있는데, 임산물은 밤나무·감나무 등이 생산된다.
수산업은 민어·꽃게 등 어류와 조개·굴·미역·피조개 등 패류와 해조류가 많이 어획된다. 덕적도 국수봉 정상에는 고대 제천단(祭天檀), 진리에는 3·1운동기념비 등 역사유적들이 있으며, 서포리의 해수욕장은 완만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교통은 인천 연안부두와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진(鎭) 1∼3리·북(北) 1∼2리·서포(西浦) 1∼3리·소야(蘇야)·문갑(文甲)·백아(白牙)·울도(蔚島) 등 12개 행정리가 있다.
군의 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1.17㎢, 인구 5,44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진촌리이다.
본래 황해도 장연군의 섬으로 모양이 고니섬 또는 곡도(鵠島)라 불리워지다가 1018년(현종 9)에 백령도라고 개칭되었는데, 그 때 진이 설치되었다.
1427년(세종 9)에 장연현에 속하게 되었다. 1895년백령면이 되어 진촌·사곶·연지 등 17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촌·가을 등 7개 리로 개편, 1945년 38도선이 남북이 갈라질 때 옹진군에 속하게 되었다. 1974년대청면이 분리되었다.
면의 동부에 용기원산(龍機院山, 136m)과 그 외에는 100m 내외의 구릉지가 발달해 있다. 동부의 진촌리 일대에는 평지가 비교적 넓게 발달되어 있어 농업이 활발하며 가장 큰 취락이 입지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서류 등이 비교적 많이 생산된다. 수산물로는 특히 홍어가 많이 어획된다.
인천 연안부두와의 사이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어 쾌속선이 운항되고 있다. 북서부 해안은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이루는 두무진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연화리의 백령중화동교회와 사곶 천연비행장, 진촌리의 조개무지와 느티나무 등도 백령도의 관광명소이다.
이 외에 한국전쟁 관련 군사유적들도 유명한데, 한국전쟁 때 공을 세운 반공청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반공유격전적비가 진촌리에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제 8240부대 소속 무명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무명용사전적비가 있다.
진촌(鎭村) 1∼7리·북포(北浦) 1∼3리·가을(加乙) 1∼3리·연화(蓮和) 1∼3리·남포(南浦) 1∼2리 등 18개 리가 있다.
군의 북부, 옹진반도 바다에 위치한 면. 면적 17.65㎢, 인구 2,24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시도리이다.
본래 강화군 지역으로 북도면이라 하여 장봉도(長峰島)·신도(信島)·시도(矢島)·모도(茅島) 등 4개 섬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에는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4개의 유인도와 아염도·사염도·선염도·오도·말못도·날가지도·동만도·만도 등 10개의 작은 무인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신도의 중앙에는 구봉산(九峰山, 178m)이 솟아 있으며, 대부분 지역이 100m 내외의 구릉지로 구성되어 있다. 군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구릉지의 농경지에서 맥류·서류 등 농산물이 생산되고, 해안의 간석지들이 메워져 농경지로 바뀌어 벼농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수산업도 활발하여 다양한 어류 및 패류·해조류 등이 생산된다.
시도리에 있는 시도해수욕장은 깨끗한 모래사장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다. 장봉도를 동서로 길게 뻗어내리고 있는 낮은 산의 맥은 그 풍경이 아름다워 장봉팔경이 전하고 있다.
섬마다 자연적인 포구가 있어 선박의 접안이 용이하며 과거에는 이들 포구에서 강화·교동·해주 등지와 연결이 많았으나, 근래에는 인천과의 연결이 가장 많으며 인천 연안부두와의 사이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시도(矢島)·신도(信島) 1∼4리·모도(茅島)·장봉(長峰) 1∼4리 등 10개 행정리가 있다.
군의 북부, 옹진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면. 면적 7.29㎢, 인구 2,18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연평리이다.
본래 황해도 해주군 지역으로 송림면이라 하여 일리·이리·삼리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옹진군 용연면 이리 일부가 병합되어 7개 리로 개편되었다. 1945년 38선 이남의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일대의 섬지역만이 옹진군에 편입되어 송림면이 되었다가 199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편되었다. 두 개의 유인도와 그 사이에 구지도(求池島)·모윤도(毛伊島)·당도(堂島) 등 4개의 작은 무인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높은 산은 없으나 대부분 지역이 100m 내외의 구릉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해안에 좁게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낮은 구릉지로 인해 주요 농산물은 맥류·서류 등 밭작물의 생산이 많으며, 벼농사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은 이 지역 주민들의 중요한 자원으로 해조류와 조기·홍어·가자미 등 어류가 많이 생산된다. 특히, 조기는 오랫동안 이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이었는데, 3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주항인 연평항에는 4∼6월에 조기의 어획량이 가장 많아 파시(波市)가 형성되었고, 여기서 거래된 조기들이 전국에 공급되었다. 소연평도에는 양질의 철광이 매장되어 있는데, 1987년부터 연간 약 25만 톤이 생산, 수출되기도 했다.
교통은 인천 연안부두와의 사이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연평리의 충민사에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 있다.
동부(東部), 중부(中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소연평(小延坪) 등 5개 행정리가 있다.
군의 중부, 대부도와 덕적군도의 사이에 위치한 면. 면적 26.04㎢, 인구 6,06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내리이다.
본래 남양부 지역으로 영흥도라 하여 목장을 두었는데 조선시대에 영흥면이 되어 선재·안도·호도 등 22개 섬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를 중심으로 선재도·측도·부도 등 4개의 유인도와 자암도·소암도·섬업벌도·외항도 등 18개의 무인도가 합쳐져 22개의 섬으로 구성되었다.
주도인 영흥도에는 국사봉(國思峰, 128m)이 솟아 있으며, 선재도에는 낮은 야산들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대체로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고, 토양층이 두껍고 비옥하여 농경지로 적합하다.
각종 밭작물의 재배와 더불어 해안 간척지 위에 조성된 농경지에서는 벼농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도 활발하나 대부분 농작물 재배와 겸업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꽃게가 많이 어획되고 김·굴·백합·새우 등의 양식업도 매우 활발하다.
인근 시화매립지에 조성되고 있는 공업단지와 신도시의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영흥도에 화력발전소가 건립되고 있다.
그리고 내리에는 십리포해수욕장이 있다. 교통은 인천과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내(內) 1∼7리·외(外) 1∼3리·선재(仙才) 1∼3리 등 13개 행정동이 있다.
군의 남부, 영흥도와 덕적군도 사이에 위치한 면. 면적 17.71㎢, 인구 1,31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자월리이다.
본래 이 지역은 1975년영흥면 자월도에 자월출장소가 설치되어 자월·이작 등 2개 리를 관할하다가 덕적면의 승봉리가 합해져 1983년에 자월면이 되었다.
자월도(紫月島)·대이작도(大伊作島)·소이작도(小伊作島)·승봉도(昇鳳島) 등 4개의 유인도와 선갑도·대초지도·소초지도·벌섬·동백도·하공경도·사승봉도·금도 등 9개의 무인도가 합해져 13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월도 남부에는 국사봉(國思峰, 126m), 선갑도에는 선갑산(仙甲山, 351m)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맥류·서류 등의 농산물이 생산되고, 아울러 벼농사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도 활발하여 다양한 어류 및 패류·해조류 등이 생산된다.
자월도·이작도·승봉도의 주변해역은 수심이 깊어 큰 선박이 접안할 수 있으며, 교통은 자월리 포구와 인천 연안부두 사이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덕적·영흥 및 육지인 남양지역과도 교류가 활발하다.
자월(紫月) 1∼3리·이작(伊作) 1∼2리·승봉(昇鳳) 등 6개 행정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