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동구는 동쪽으로 남구와 부평구, 서쪽으로 중구 영종도, 남쪽으로 연수구, 북쪽으로 서구에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35′∼126°39′, 북위 37°27′∼37°29′이며, 면적은 7.19㎢, 인구는 7만 257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1개 행정동(7개 법정동)이 있고, 구청은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에 위치해 있다.
동구는 해안 저지대와 구릉성 평야가 대략 절반씩을 차지하고 있는 지형을 보인다. 과거에는 숲이 무성한 산지와 구릉지가 대부분이었고, 농경지와 대지 등 평지가 부분적으로 섞여 있었다. 1883년 경 동구 지역의 토지 이용은 밭이 65%, 논이 25%, 대지가 10%를 차지하고 있었다.전통적으로 동구는 경지가 비옥하지 못하고, 평균 3년에 한 번씩 가뭄이 찾아올 정도로 물이 부족한 지역이었다. 현재는 일부 공원 및 학교 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시가지화 되었다.
해안에 인접한 북부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래 매립된 간척지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임해공업지역으로 조성되었고, 이후 동쪽으로 주안, 부평공단과 연결되어 경인공업지역의 서쪽 끝을 이룬다. 이 공업지역의 남쪽은 낮은 구릉지가 발달하여 그 위에 구한말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한국인 취락을 모체로 주택지역이 형성되었다. 또한 간선도로를 따라 시가지 지역이 형성되어 경인선 철도를 경계로 중구와 접해있다. 과거에는 이 구릉성 산지 사이로 좁은 해로가 형성되어 작은 배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왔었으며, 산지와 소하천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동구 지역의 연평균 기온은 12.9℃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7.5㎜를 보이고 있다.(2008년 현재)
동구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송림산 산록에서 작은 돌도끼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인천 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선사시대 유물이다. 만석동에서는 1949년 흑색 점판암으로 된 길이 8.5㎝, 폭 5㎝ 크기의 돌도끼가 발견되었다. 한편 동구의 유일한 섬이며 과거 ‘물치섬’이라 불렸던 작약도의 조개더미에서는 석기와 빗살무늬토기 및 돌화살촉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해안 방어를 위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해안가에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창영동 일대에는 고려시대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성터가 남아 있었는데, 시가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현재는 없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성 이씨(固城李氏), 평창 이씨(平昌李氏), 전주 이씨(全州李氏) 등이 자리잡은 마을이 있었고, 그 외에 창녕 조씨(昌寧曺氏) 역시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도 이들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다.
동구는 구한말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 지역으로 근대화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외세의 잦은 침략으로 인천이 수도의 관문으로 인식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방비책이 거론되었는데, 1879년(고종 16) 현재의 화수동 일대에 화도진이 설치되었고, 화도진으로 하여금 묘도(괭이부리), 북변 포대등 7개 포대를 관할케 하였다. 화도진은 1882년 5월 22일 조선의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미국의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이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역사적 장소이다. 1992년에는 이곳에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표지석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인구는 1883년 인천항 개항을 기점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자 국내 교통은 물론 세계 각국과의 외교 통상이 활발해져 사방에서 이주민이 유입되었다. 부두 주변에 급격히 시가지가 조성되어 동구 일대에 주로 상공업 관련 노무자들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화평동과 화수동, 창영동, 송림동 등에 거주하면서, 주로 운반업을 하거나 부두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로 종사하였다. 특히 인천항 개항과 함께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지금의 금곡동 일대 2000여 평의 대지 위에는 조선 성냥회사가 설립되었다. 이곳은 300여 명의 종업원이 하루 수 만 통의 성냥을 만들어 내던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성냥 제조공장이었다. 이 회사는 당시 국내 성냥 소비량의 20%를 점유할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하였다.
1903년(광무 7)에는 제물포 지구의 분동(分洞)이 이루어졌다. 시가지가 조성되고 주거지가 확대되어 새로운 취락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인천부 다소면 소속의 고잔리가 폐지되어 만석동, 화촌동, 평리로 분할되었고, 원래의 송림리도 송림리, 송현리, 우각리로 분할되었다.
1906년 11월에는 송림동과 노량진 간의 인천 상수도가 개설되었고, 1907년에는 화촌동이 화촌동, 신촌리, 수유동으로 분할되었으며, 평리는 평동으로 개칭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는 부내면(府內面)의 동리명이 개정되었다. 송림리, 송현리, 평동, 금곡리, 우각리, 만석동, 화촌동, 수유동 등이었는데, 모두 오늘날의 동구에 속해 있는 지명들이다.
1914년 4월 1일에는 지금의 중구와 동구 지역만을 인천부로 하고, 인천의 나머지 전역과 도서 지방을 통합해 부천군이라는 행정 구역을 신설하였다. 아울러 인천부의 정리명(町里名)을 개정하고 구역을 확정하였다. 이 때 금곡리, 우각리, 송림리, 송현리는 그대로 두고, 평동과 화촌동을 통합해 화평리로, 만석리를 만석동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수유동 일부를 묘도정(猫島町)으로 독립시켰다.
한편 동구는 일제강점기 경인공업지대의 중심지였다. 1934년 현 동일방직(주)의 전신인 동양방적(주)이 설립되었고, 1937년 현 대우중공업의 전신인 조선기계제작소가 설립되었다. 1940년에는 현 인천제철(주)의 전신인 조선이연금속(주)이 설립되었다.
광복 후인 1949년 5월, 동구는 인천시의 본청 관할 구역 내에 속하였다. 1956년 11월 23일 인천시 조례 제114호로 인천시 출장소 설치 조례가 개정되어 1957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때 기존의 5개 출장소 외에 본청 관할 구역을 중부, 북부, 동부, 남부 등 4개의 출장소 관할구역으로 분획되었고, 여기에 각각 새로운 출장소가 증설되었다.
현재 동구의 모태가 된 행정구역은 북부출장소(11개동 관할)와 동부출장소(8개동 관할)가 관할했던 지역이다. 1963년 1월 1일 부천군 영종면 운남리 작약도가 인천시 만석동에 편입되었고, 북부출장소와 동부출장소가 병합되어 동구가 설치되었다.
1973년 3월 12일에는 동구 관할의 월미도가 중구로 편입되었다. 1981년 3월 13일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인천직할시 동구가 되었으며, 그 후 1988년 5월 1일 동구는 자치구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인천이 광역시로 개칭되면서, 동구는 인천광역시 동구로 불리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화도진을 들 수 있다. 화도진은 조선말 자주 출몰하던 외국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 화도 고개 아래에 설치한 군영(軍營)이다. 이곳은 북성 포대, 논현 포대 등을 관장하며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도 수로를 지키는 기능을 하였다.
진(鎭)은 진영장(鎭營將)의 품계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3등급이 있었는데, 화도진은 만호(萬戶), 도위(都尉)가 주재하는 제진에 해당하였다. 화도진이 세워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강화도 조약 이후 무리하게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천은 1875년(고종 12)에 이미 방어영이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 정부는 1878년 8월 27일 어영대장 신정희를 인천과 부평 등지로 파견하여 이 일대에 진과 포대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화도진은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혁되면서 모든 군대가 군부에 소속되면서 철폐되었다. 이 때 지방군사 조직인 진위연대의 예하 부대가 월미도에 주둔하게 되었고, 화도진 건물을 철거하여 여기에서 나온 자재를 병영 건축에 사용하였다. 잔여 건물은 광복 전, 해안 매립 때 철거되었다. 이후 화도진은 1988년 9월 유희강(柳熙綱)의 ‘화도진 복원도’를 토대로 동헌과 포대를 갖춘 건물로 복원되었다.
199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창영초등학교의 옛 교사는 창영동에 위치한 일제 전반기 건물이다. 건물은 일자형 단순 배치에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벽체 상단은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현관은 홍예석으로 만든 초기 근세풍 양식을 취하고 있다. 외형은 대칭 앞면의 넓은 창과 평활한 면에 의해 직선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지붕에는 도머(지붕 아랫방을 밝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지붕창)가 설치되어 있으며, 교실 내벽은 나무 졸대심을 넣어 흙을 발랐다. 현관 복도의 난간이나 기둥 등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인천창영초등학교는 1907년 순수 민족 자본으로 세운 인천공립보통학교가 모태가 되었다. 인근에는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당이 자리하고 있고, 당시 주변에 위치했던 고서점 거리와 어울려 이 일대는 인천 지역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인천창영초등학교는 3·1운동 당시 인천 만세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였다. 3·1만세 시위에 고무된 3, 4학년생 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등을 중심으로, 학생들은 1919년 3월 6일 학교 전화선을 끊고 동맹휴교를 선언하였다. 이들은 3월 6일 정오에 학교를 출발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 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 이에 격분한 인천 시민들은 동맹 휴교와 상가 철시를 시작으로 3월 7일부터 8월까지 지속적인 군중 시위를 이어갔다. 현재 창영초등학교 내에는 인천에서 최초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3·1 독립운동 인천 지역 발상지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창영초등학교 본관동(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01년 지정)이 남아 있다.
선교의 목적을 갖고 신식 교육을 위해 설립된 영화학교는 1909년 우각현의 대지 1226평을 매입하여 연면적 212평의 3층 교사를 지었다. 이 건물은 1910년 3월 30일에 착공하여 1911년 9월 14일에 완공되었다. 교사는 언덕 위에 입지하여 주위의 전망을 트이게 하고 남쪽에 운동장을 두었다. 건립 당시에 설치되었던 지하실의 보일러 및 스팀 장치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나, 건물 벽체에 설치된 2개의 굴뚝은 그곳이 보일러실이었음을 알려준다.
이 건물은 현관 부분을 돌출시킨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1954년 건물을 증축하여 흔적만 남게 되었다. 현재 건물은 증축된 부분들을 제외하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재래식 벽돌을 이용한 적벽돌 구조를 이루고 있다. 지붕면은 각각의 방향으로 박공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양식풍의 특성을 띤다. 지붕 재료는 처음에는 양철이었으나, 현재는 슬레이트와 기와로 이루어져 있다.
1894년 4월 인천 최초의 신식교육 발상지인 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와 1907년 5월 인천 최초의 보통학교인 인천공립 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가 동구 지역에 설립된 바 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8개교, 중학교 3개교, 고등학교는 3개교가 있으며, 산업정보학교가 위치해 있다.
한편 현재 동구 지역의 문화시설로는 송림동에 위치한 청소년수련관과 화수동에 위치한 화도진도서관 등이 있으며, 창영동의 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송림동의 청소년문화의집 등이 복지시설로서 위치해 있다.
동구에는 1970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령탈춤이 전승되고 있다. 강령탈춤은 황해도 일대에서 행해지던 탈놀이 가운데 하나이다. 황해도의 탈춤은 내륙 평야지대인 황주, 서흥, 봉산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봉산탈춤과 해주, 옹진, 강령 등 해안지대를 대표하는 강령탈춤(해주탈춤)으로 나뉜다.
강령탈춤은 대사의 내용에서 말뚝이와 양반의 재담 부분은 매우 독창적이고, 우리말의 묘미와 강령의 지방색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강령탈춤은 황해도의 다른 지방 탈춤과 마찬가지로 오월 단오절에 행해졌다. 해주 감영에서는 도내 각지에서 모인 여러 탈춤패들의 경연이 이루어졌고, 우승 팀에게는 상금 천냥과 부상이 수여되었다. 단오가 지나고, 10일 후에는 뒷풀이라는 명목으로 이 놀이가 다시 연회되었고, 이것이 끝나면 모든 탈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현재는 탈을 보관하였다가 다시 사용하고 있다.
동구는 풍어제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풍어제는 1985년 2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풍어제는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바닷가 마을이나, 배를 부리는 집에서 매년 또는 몇 년에 한 번씩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행하는 굿을 말한다. 이 굿은 크게 ‘배 연신굿’과 ‘대동굿’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 연신굿이란 선주(船主)들이 자신의 배와 선원의 안전, 그리고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무녀(巫女)의 관장 하에 배 위에서 행하는 굿을 말한다. 대동굿은 마을 사람들이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 협동과 화목을 기원하기 위해 공동으로 비용을 마련해 행하던 마을 공동의 제의(祭儀)를 말한다.
배 연신굿은 신청울림(신을 청하는 굿)을 시작으로, 강변굿까지 12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동굿은 신청울림을 시작으로, 해상에서 생명을 잃은 넋을 달래고 마을의 액운을 띄배에 실어 보내는 강변용신굿까지 24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에도 1992년 7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황해도 평산 소놀음굿이 있다. 평산 소놀음굿은 황해도 평산 지방에서 농사의 풍년, 장사의 번창,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고, 마을의 협동과 화합을 다지기 위해 행해졌던 경사굿의 하나로, 신청 울림을 시작으로 마당굿까지 15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굿의 내용은 제석(帝釋)이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지상에 내려와 인간을 탄생시키고 조선국(朝鮮國)을 개국한 내력을 타령으로 부르고, 이 천상놀이가 끝나면 지상놀이가 시작되는데, 제석이 마부를 상대로 농사일을 감독하는 과정과 소를 길들여 부리는 요령, 쟁기에 보습을 맞추는 과정을 타령과 대화로 엮어간다. 이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제석굿에서 소놀음굿으로 이어질 때 마당에 8선녀가 타고 내려온 무지개를 상징하는 천을 늘어뜨리고, 그 밑 물동이에 물을 담아 바가지를 띄워 놓는 부분이다. 이는 선녀가 목욕 후 복을 주고 승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석동에는 괭이부리 호랑이굴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그곳은 삼림이 울창한 해변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부녀자 대여섯 명이 나물을 캐러 괭이부리산으로 갔다가 굴을 하나 발견하였다. 굴 안에는 호랑이 새끼 3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는데, 부녀자들이 호랑이 새끼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있자, 갑자기 어미 호랑이가 나타나 “어흥”하는 소리를 질렀다. 부녀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나물 바구니와 행주치마도 버리고 집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그들이 놓고 온 바구니와 행주치마가 마을 안에 놓여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그 호랑이가 ‘제 새끼들을 해치지 않아 고맙다’고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한편 송림동에는 부처산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은 돌부처 88개를 보관하던 일본 절이 있었고, 산 등이 부처 형상이라 하여 부처산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광복 직후에는 이곳 주민들에 의해 깨어져 나간 부처돌 조각들이 산 주변에 널려 있어 부처산의 이름을 실감나게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일본 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돌 거북상은 현재 동산고등학교 내에 위치해 있다.
화수동에는 화수고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화수동은 ‘샛말’이라고 불리다, 신화수리로 변경되었고, 다시 화수동으로 개명되었다. 화도고개 주변은 인천 이씨 조상들을 모시는 선산이 있었으며, 소나무와 잡목들이 무성하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화도진 야산을 개간하여 그 근방에 한국기계, 이천전기 등의 공장을 건설했다. 화도고개는 중국과의 왕래에 있어 중요한 지역으로, 항상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터가 좋아 공신들의 묘소가 많았다.
또한 이곳 주민들은 해마다 풍수지리설에 밝은 사람으로 하여금 한복을 입고 절을 세 번하도록 한 후, 돌탑 위에 돌을 한 개씩 더 쌓았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이 주변을 신성한 장소로 여겨, 외부인들이 침범하지 못 하도록 새끼줄로 울타리를 만들어 보존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던 고관들도 말을 타고 가다 내려 서낭당에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전해진다.
동구는 임해공업지역과 이를 지원하기 위한 시가지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지역이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과밀 주거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자연녹지가 전무하다. 현재 31%에 달하는 토지가 공장 용지로 이용되고 있을 만큼 공업 지역의 비중이 크다. 동구는 섬유, 목재, 제철 등의 중공업이 발달되어 있지만 상업 활동에 있어서는 지역 내 대부분의 시장이 1970년대 개설된 재래시장으로, 백화점, 쇼핑센터 등 현대적 유통시설이 부족한 실정이다. 최근 인천교 매립지에 대규모 공구 상가 및 산업유통단지를 유치하는 등 지역 경제의 활성화가 기대되고 있다.
동구의 남쪽 경계에는 경인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공업지역에 인접해 형성되어 있는 도로가 서쪽으로는 월미도 및 인천항 부두, 동쪽으로는 경인고속도로 및 서구 해안 매립지역의 공업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어 큰 역할을 한다. 주거지와 시가지 구간은 송림동 로터리를 중심으로 간선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나, 그 외에는 구릉지의 지형적 제약 및 주거지 밀집 때문에 도로의 폭이 좁고, 불규칙한 패턴을 보인다.
동구는 협소한 면적에 인천의 대표적 상권인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학교, 시장, 유흥시설이 밀집하고 있어 만화로, 송림로 등 주요 간선도로의 교통량이 매우 많다. 도로는 지형적 여건으로 인해 대부분 격자형이 아닌 굴곡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간선축 역할을 하는 반월로와 만화로 구간이 상대적으로 협소하고 교통난이 심하다.
화도진은 1882년(고종 19) 5월 22일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된 장소로 유명하다. 화도진지는 화수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화도진을 설치하게 된 배경은 1877년(고종 14) ‘일본인들이 전라도 방면을 측량한 후 상경할 것’이라는 동래부사의 보고를 접한 조정에서 대책을 논의하였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인천, 부평 연안의 방어를 위해 1878년(고종 15년) 8월 화도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진(鎭)’이란 ‘진영(鎭營)’의 준말로, 조선 초부터 지방대의 준영군으로 각 수영과 병영 밑에 두었던 직소를 말하며, 진사(鎭祉)란 진이 있던 터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화도진은 구한말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천 연안에 진과포대를 세운 장소인 것이다.
인천시는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화진포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 할 계획을 세워 1차로 3억 원을 들여 500평을 개발하고, 기념 표지석을 세웠다. 이후 1988년 12월 옛 화도진지를 기본으로 6252평에 33억 원을 투입, 화도진 병영을 완전 복원하고, 각종 편의시설 및 부대시설을 갖춰 도심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화도진공원 안에 있는 주요 시설물로는은 동헌, 내사, 사랑채, 전시관 등의 건물이 있다.
한편 만석동에 위치한 작약도는 인천 연안부두 북서쪽 약 5㎞ 지점에 있으며, 면적 3만 7600여 평, 섬 둘레는 1.2㎞이다. 연안부두의 연안여객선터미널이 생기기 전에는 만석부두에 정기노선이 있었고, 현재는 연안부두에서 작약도행 배가 떠난다. 작약도는 숲이 잘 보존되어 있고, 산정에서 주변을 둘러 보면, 작약도 특유의 개방감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1999년 인하대학교에서 발간한 『인천지역 유적 · 유물 지명표』에 의하면, “만석동 작약도에는 선사시대 조개더미와 함께 그곳에서 석기와 빗살무늬토기 및 돌화촉이 출토되었으나, 소장처는 불분명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작약도는 영종진(永宗鎭)에 땔나무를 공급하였던 수목지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작약도의 원래 이름은 물치섬이다. 작약도는 월미도 북서쪽, 강화와 김포 사이의 염하(鹽河)와 인천 앞바다를 잇는 해수로(海水路) 상에 위치한 섬이기 때문에, 조수간만의 영향으로 ‘바닷물이 섬에 받힌다’는 의미에서 물치섬(勿淄島)이라 불러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작약도는 『청구도(靑邱圖)』, 『대동지지(大東地志)』,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에 ‘물치도(勿淄島)’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1919년 제작된 1:50000지형도(조선총독부)와『인천부사(仁川府史)』에는 ‘작약도’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밖에 동구의 명물로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 있다. 이곳은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의 경계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골목은 경인선 철로가 놓이기 전,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대표적인 통로였던 ‘우각리 길’이었다. 배움에 목말랐던 1960∼70년대 학문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던 인천의 유일한 헌책방 골목이기도 하였다. 이 골목에는 헌 책을 파는 서점을 비롯, 일반 서점까지 합쳐 약 10여 개의 책방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는 국문학적인 고서 자료로부터 미술, 음악, 한방, 그리고 어린이 전집류, 사전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서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인천부 만석리(萬石里)라고 불리던 곳이며, 일제강점기 만석정으로 개칭되었고, 광복 이후 만석동이 되었다. 구한말 이곳에는 월미도진과 묘도 포대가 구축되어, 병인양요를 겪기도 한 역사적인 지역이다.
1968년 1월 1일 인천시 구제 실시에 따라 인천시 동구 만석동으로 명명되었다. 공업지역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특히 주거환경이 열악한 저소득층 밀집 지역이 있어, 현재 이곳에 주거환경 개선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2008년 현재)
금창동은 금곡동과 창영동을 합쳐 만들어진 지명이다. 금곡동은 1921년 금곡정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고, 창영동은 1945년 인천시 우각리가 개칭된 이름이다. 금곡동과 창영동은 1985년 9월 19일 통합되었다.
금창동은 남구와 중구를 인접하여 있고, 도원역이 위치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인천세무서, 창영초등학교 외 3개 학교, 고서적 거리, 완구 문구 도매상가 및 배다리 공예 상가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인천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인 창영초등학교(구)교사(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인천기독교 사회복지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 등의 국가유산이 위치해 있다.
화수동은 1882년 한미수교통상조약이 조인된 역사적인 장소이다. 화수동은 구한말까지 인천부 신화수리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화수정이 되었으며, 1946년 1월 1일 동명 개정으로 현재의 명칭인 화수동이 되었다.
또한 화평동은 1895년 인천부 부내면 평동(平洞)이었으나, 1914년 화촌면과 함께 화평리로 통합되었다. 그 후 1936년 인천부 화평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에 이르러 인천시 화평동으로 개명되었다.
화수동과 화평동은 인천의 구도심에 해당하기 때문에 시가지가 대체로 노후화되어 있다. 현재 관내의 곳곳에서 주거환경 개선 사업이 진행 중이다.(2008년 현재)
송현동은 동인천역의 배후 시가지로 성장한 지역이다. 송현동은 만화로를 중심으로 조성된 중앙시장(일명 양키시장)과, 광복 이후 자연스럽게 조성된 송현시장이 들어서 있어 한때는 전형적인 상가 지역으로 번화함을 자랑했던 지역이다. 그러나 현재는 낡은 주택 지역의 개량과 재래시장 현대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1999년부터 송현 지구 주거환경 개선 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송림동은 동인천, 제물포, 인천교 등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송림 1∼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송림동은 인천 구도심에 해당하는 주택 밀집 지역이며, 송림로에 접한 일부 지역은 상가지구로 조성되어있다. 주거환경 개선 사업지구로 지정되어, 현재 대부분 지역에 사업이 진행 중이다.(2008년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