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경기도 부천시, 서쪽은 서구, 남쪽은 부평구, 북쪽은 경기도 김포시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40′~126°47′, 북위 37°31′~37°35′에 위치한다. 면적은 45.57㎢이고, 인구는 33만 433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1개 행정동(23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4동에 있다.
이 지역의 중심에 솟아 있는 계양산은 인천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그 남쪽에는 부평지역의 중심지였던 부평도호부가 입지하고 있었다. 부평도호부는 일제강점기에 경인선 철도와 경인국도가 개통되면서 부평역 인근 지역이 상업 및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함에 따라 구읍으로 전락했다.
계양산과 그 남서쪽으로 뻗은 천마산을 경계로 서구와 맞닿아 있으며, 임꺽정의 전설이 남아 있는 경명현(장명이 고개)을 통해 서구지역으로 교통로가 개설되어 있다. 계양산 남쪽과 동쪽으로는 계산천과 굴포천이 흘러 부평평야를 이루어 과거에는 대규모로 벼농사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계양산 북쪽지역은 5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매우 발달해 있고, 그 분수령의 산록을 따라 시천천이 흘러 황해로 흘러들며, 귤현천과 계양천 등은 북쪽으로 흘러간다. 그 골짜기들은 충적층으로 덮여 있으며 논으로 이용된다. 전체적으로 계양산 북쪽 지역은 임야와 경지가 널리 분포해 있고, 남쪽 지역은 대지 및 공장용지로 많이 이용된다.
주요 산으로는 계양산(395m), 중구봉(250m), 천마산(227m), 당산(100m)이 있다. 소하천으로는 귤현동의 다남천과 서주천 장기동의 장기천, 다남동의 성황천, 박촌동의 방축천, 목상동의 목상천과 서리천, 계산동의 지선천, 효성동의 흑룡천 등이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3℃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157㎜를 보이고 있다.
계양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의 유물 및 유적이 출토된 바 없다. 다만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도끼 두 점이 계산동 일대에서 수습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고구려가 470년 주부토군(主夫吐郡)을 설치하면서 계양구 지역이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마한의 영역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는 주부토군(主夫吐郡)이 장제군(長提郡)으로 개칭되었다.
9세기 말 통일신라의 세력이 쇠퇴하여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웠을 때, 궁예는 905년 계양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따라서 후삼국시대에 이곳은 후고구려의 판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란기였기 때문에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지는 못하였고, 그 대신 이 고장의 호족이었던 이희목(李希穆)이 계양과 김포 일대를 관장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이희목은 나중에 왕건을 도와 고려의 개국공신에 책봉되었다고 하며, 오늘날의 부평 이씨는 그를 시조로 삼고 있다.
940년(태조 23)에 수주(樹州)로 승격되었으며, 1105년(숙종 10) 소성현(邵城縣)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어 수주에서 분리되었다. 1150년(의종 4) 수주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되었으며, 당시 도호부청사는 지금의 계산동(桂山洞) 지역에 위치하였다.
1215년(고종 2) 안남도호부가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개칭된 후 1219년(인종 6) 좌사간(左司諫) 이규보(李奎報)가 계양도호부 부사(副使)로 부임하여 『자오당기(自娛堂記)』, 『초정기(草亭記)』, 『망해지(望海誌)』 등 많은 문집을 남겼다.
1310년(충선왕 2)에는 부평부로 개칭되었다. 부평부의 속현은 계양도호부 시절에 모두 분리 자립하고 양천현만 남아 있었으나 이 역시 부평부로 개칭될 때 분리되었다. 또한 황어현을 폐지하고 이 지역을 부평부에 통합시키는 등 관할구역이 변화되었다.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도 아래에 부, 목, 군, 현을 두었으며 모든 읍에는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부평은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김포현을 편입시켰다가 2년 후 다시 분리시켰다. 부평도호부에는 1455년 중익진(中翼陣)이 설치되어 부사(府使)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그 진영의 소재지는 지금의 병방동(兵房洞)이었다. 이 같은 익군 체제는 곧 폐지되고 진관체제(鎭管體制)로 바뀌었으며 부평은 수원진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부평도호부의 읍격(邑格)이나 명칭은 변하지 않았으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도호부로 복구된 일이 세 차례 있었다. 1438년(세종 20) 부평도호부는 부평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446년(세종 28)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는데 이것은 관과 민이 공모하여 온천의 소재를 숨기고 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하였고 등에는 부종(浮腫)이 생겨 고생하였다. 세종은 중신들의 권유로 온양온천에 가서 목욕한 후 효험을 보았고, 이후 온천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도성에 가까운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온천 탐색을 명하였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백방으로 탐색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에 세종은 부평의 관민이 짜고 민폐를 두려워하여 온천의 소재지를 숨긴 것으로 판단하여 도호부를 현으로 강등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온천을 찾지 못한 세종은 온천 탐색을 포기하고 부평현을 다시 도호부로 복구시켰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부평 출신 내시 김순손(金舜孫)을 처형한 후 부평도호부를 부평현으로 강등하였다가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중종 1)에 다시 복구한 일이 있었다. 김순손은 연산군이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궁중에서 문란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를 간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연산군은 그를 유배지에서 죽이고 그의 출신지를 강등하였던 것이다. 중종반정 후 김순손은 명예가 회복되었고 부평현도 강등 1년 만에 복구되었다.
1698년(숙종 24)에 부평도호부는 부평현으로 세 번째 강등되었다. 그것은 김포의 장릉(章陵)에 방화한 죄인 최필성(崔弼成)의 출생지가 부평이었기 때문이다. 장릉은 조선조 선조의 다섯째 아들 원종(元宗: 인조의 생부, 추존)과 그의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 추존)의 능침으로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하여 이곳으로 이장한 묘소이다. 죄인 최필성은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처는 양반집 노비가 되었으며, 부평은 현으로 강등된 지 10년 만인 1707년(숙종 33)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다. 이때 각 도의 관찰사를 장관으로 개칭하고 도의 하부 행정조직으로 부 · 군 · 면을 두었다. 그리하여 13도 12부 317군 4,322면이 확정되고 종전에 직할 하에 있던 한성부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부평부는 경기도 직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지방제도를 개혁할 당시 서해안의 관문인 인천에 개항장을 설치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인천이 부(府)로 승격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 일대의 지역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1913년 12월 29일에 제정 공포된 부령 제111호(1914년 10월 1일부터 시행)에 인천부의 관할구역은 개항장으로 축소를 하고 다른 지역은 전부 부평군으로 통합하게 되었다. 이때 부평군의 일원과 인천부에 편입되지 아니한 종래의 인천군 나머지 지역 전부 그리고 강화군의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부평에서의 ‘부’자와 인천에서 ‘천’자를 합성한 부천군을 신설하였다. 당시 부천군의 행정구역은 파주면을 비롯하여 15개 면, 148개 리였다.
1919년 3월 1일에 발발한 3·1만세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인천지역에서 가장 큰 시위운동이 일어난 곳은 계양이었다. 3월 13일 이후 소래면(蘇萊面)과 계양면(桂陽面) 주민 수 백 명이 소래산에서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으며 읍내에서도 수백 명이 모여 시위를 한 바 있었다. 이는 인천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위였고, 이에 대응했던 담당 경찰서는 부내주재소(富內駐在所: 계산동 위치)였다.
1968년 1월 1일 시행된 「인천시 구(區) 설치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과거 부평지역의 일부가 독립된 행정단위로 ‘북구’라는 이름이 되었다. 즉 부내면(富內面) 지역과 서곶면(西串面) 지역이 북구가 된 것이다. 1973년 7월 1일 법률 제2597호에 의하여 소사읍(素砂邑)이 발전적으로 부천시로 개칭되면서 계양면과 오정면은 김포군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1호에 의하여 김포군 계양면이 인천시에 편입하여 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평군의 부내면은 일부가 부평구로 독립하고, 부내면의 일부와 계양면이 통합하여 계양구가 되었으며, 서곶면이 김포군의 검단면과 통합하여 서구가 되었고, 소사와 오정이 통합하여 부천시를 구성하였다. 즉 과거의 부평군은 현재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 서구와 부천시로 분리되어 있다.
인천은 1995년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승격되었고, 아울러 인천광역시 북구를 다시 분할하여 경인고속국도를 경계로 그 남쪽은 부평구로, 북쪽은 계양구로 나누었다. 계양이라는 읍호는 1215년에 처음 붙여진 이래 1308년에 길주목이 될 때까지 93년간 사용되었으며, 진산에 해상하는 계양산의 명칭이 유지되어 일제강점기나 광복 이후에도 그 이름을 딴 계양면이 있었다. 그리고 광역시의 승격과 분구가 이루어질 때 이를 계승하여 계양구가 재등장했다.
198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부평도호부청사는 원래 계산동 898번지에 있었지만, 현재는 계산동 943번지 부평초등학교 내에 있다. 옛 청사 건물이 변형되었으나 일부는 남아 있다. 이곳에는 계산동은행나무, 욕은지, 어사대의 흔적이 도호부청사 앞에 남아 있다. 계산동은행나무는 1992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욕은지는 1982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어사대는 1990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부평도호부청사는 1677년(숙종 3)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워진 내력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시대 1150년(의종 4)에 안남도호부로, 1215년(고종 2)에 계양도호부로,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부평부가 부평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청사 건립에 착수하여 약 5년 후인 1418년(태종 18)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사 앞에 풍치목으로 심어진 은행나무의 수령이 약 600여 년쯤 된다는 사실도 그 같은 추정을 가능케 한다. 기록에 의하면 객사, 동 · 서헌, 삼문, 근민당, 좌 · 우익랑, 동 · 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등 총 23동 23칸으로 당시에는 웅장한 규모였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내아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원래 ‘ㄱ’자 건물이었으나 1968년 현 위치로 이동하면서 ‘ㅡ’자 건물로 바뀌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도리집이 되었다
부평향교는 현재의 경인교육대학교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1127년(인종 5) 왕명에 따라 수주향교가 계양구 오류동 산 4번지에 세워졌는데 당시 수주의 후칭인 안남도호부가 1165년(의종 19)에 계산동(온수골)으로 이전됨에 따라 안남 향교도 계양산 남쪽(현재 계산2동 한우리 아파트 부근)으로 이전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10년(충선왕 2) 부평부가 되면서 부평향교로 고쳐 불러왔고 병자호란(1636)으로 문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1688년(숙종 14)에 현재의 위치에 문묘를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평향교는 명륜당, 재실 등의 교육시설을 앞에 놓고 그 뒤에 대성전과 동 · 서무의 문묘시설을 둔 우리나라 향교의 전형적인 ‘전당후묘’ 형식이다. 열성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대성전과 동 · 서무, 동 · 서재는 맞배지붕형식으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팔작지붕이다.
계양산성(사적, 2020년 지정)은 계양산(해발 394.9m) 주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뻗어 내린 230m 지점, 즉 계산동 산10번지 작은 봉우리에 위치해 있다.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석성으로 축조양식은 퇴뫼식, 성벽은 내탁식이다. 고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성은 실측 결과 산성의 총길이가 1,180m, 성곽의 외부는 잘 다듬어진 돌로 5m 높이로 쌓아 올린 형태이다. 동북으로 한강 유역의 김포평야와 남서로는 서해의 관문인 인천항, 수도 서울과의 연결교통 요충지인 이곳은 예부터 군사적, 경제적 주요한 수로 교통의 요지였다. 기본적인 지리적 여건이 외적방어와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배산임수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어 군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성이면서 성내가 사방으로 노출되는 특이한 성이다. 현재 산성의 복원을 위해 발굴 조사 중에 있으며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로는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계양구와 서구의 경계를 이루는 경명치(징매이 고개)를 중심으로 하여 능선을 따라서는 중심성이라는 산성이 있다. 1883년(고종 20) 부평부사 박희방이 부민들을 동원하여 경명치 일대에 축조한 성곽이다. 해면 방어선이 무너지고 이 고개만 넘으면 바로 70리 거리 한양에 도달할 수가 있어 이곳을 서해안 제2전선으로 중요시하고 유사시에 대비하고자 경명치 좌우에 성을 축조하려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금 염출이 여의치 못하여 고민하던 중 부평고을의 독지가가 금 60냥을 헌금하므로 이를 토대로 부민들이 동원되어 축조 1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성곽은 토성에다 외부를 석축으로 하였는데 계양산에 3~4개소의 유석층이 있어 돌을 뜨지 않고 손쉽게 운반하여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다만 부민들이나 책임자인 박희방 부사 역시 문관 출신이라 성 축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견고하지 못한 형식의 성곽이 축조된 것이며 주민들의 뜻을 모아 축조한 것이라 하여 박희방 부사가 중심성이라 작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성은 군사 목적으로 쌓았으나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사용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견고하지 못해 10년도 못되어서 무너져 내리고 자연 소실되는 등 방치되었다. 그 후 1914년 완전히 헐어버려 지금은 흙과 소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 길이 또한 500여 m에서 최근 지표 조사 시 실측된 1,000m 등 정확히 문헌에 기록된 바가 없다.
영신군 이이묘(인천광역시 기념물, 1999년 지정)가 작전2동 산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의성군 채(寀)의 여섯 째 아들인 이이는 1454년(단종 2)에 출생하여 왕족으로서 종실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 정의대부 영신군에 봉해졌으며 1526년(중종 21) 73세로 사망하였다.
영신공원(永新公園)으로 조성된 묘역은 그의 묘를 비롯한 가족묘 10 여기가 위치하고 있는데, 첫째 아들인 명원군(明原君)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따로 있고, 둘째 아들인 함원군(咸原君)의 묘가 이곳에 있다. 함원군(咸原君)은 경학에 밝고 정직 청백하고 어전에서 치평지도(治平之道)를 건의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사망하자 명종(明宗)이 승지 홍대협을 통하여 술과 제문을 내렸다고 한다. 묘 앞에는 묘갈과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왕실 묘제와 시제 그리고 미술 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 계양구에는 부평향교(계산 1동에 소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1932년 계양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지금의 계양초등학교의 전신으로 1932년 12월 3일에 개교하였다. 1938년에는 계양공립심상소학교로 개명되고, 1941년에는 계양공립국민학교로 개명되었다.
1946년에는 소양초등학교가 개교되어 초등교육기관이 확충되었고, 1990년에는 인천교육대학교(계산동 산 59-12)가 신축교사를 완공 이전함으로써 계양은 고등교육시대를 맞았다. 2004년 인천교육대학교는 경기도 안양에 경기캠퍼스를 개교시키면서 경인교육대학교로 교명을 바꾸어 현재에 이른다. 1992년 3월 2일에는 경인여자전문대학(지금의 경인여자대학)이 개교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6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1개교, 경인여자대학교와 경인교육대학교가 있고, 특수학교로는 인혜학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계양문화회관이 계산 2동에 있고 청소년수련관이 방축동에 있다. 기타 복지시설로는 계양종합사회복지관이 서운동에 있고, 계양도서관이 계산동에 있다. 기타 체육시설로서 인천시 계산구장, 서운 간이체육관 등이 있다.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부평도호부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구민의 날(10월 5일)을 전후하여 계양산 축제를 벌이고 있다. 축제의 내용은 정조의 어가행렬을 재연하고 국악 한마당을 노는 것이 주축을 이룬다.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는 1797년(정조 21) 8월 15일 장릉 전배를 마치고 16일에 김포행궁을 떠나 부평부에 들렀다고 한다. 또한 정조가 김포 장릉에 행차하여 제사를 지내고 가는 도중 부평에 들러 어사대(계산동 소재)에서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문헌을 바탕으로 잊혀 가는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역사적 볼거리를 제공하여 구민의 애향심과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 계양산 축제이다.
계양산 상봉 남쪽 중턱의 장사굴에 관한 전설이 있다. 굴 입구는 비좁아 사람이 기어들어 가야만 되고 안으로 들어가면 5~6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굴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기도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굴에 대하여 세 가지 전설이 있는데, 첫 번째는 옛날 이 굴에서 장사(壯士)가 났는데 어찌나 힘이 세고 컸는지 그 장사는 그 굴에서 나와 남쪽으로 걸어가 영성산(靈城山) 기슭을 지날 때 넓적한 바위를 밟고 지나갔으며 발자국이 그 바위에 패여 남아있다고 전한다. 두 번째로 옛날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평 땅에 침입하여 부평향교에 불을 지를 염려가 있어 유생들이 향교에 있는 공자를 위시해 여려 명현들의 위판을 이 장수굴에 안치하였다가 난이 평정된 뒤에 다시 봉안하였다. 인근 향교는 모두 불에 타니 훗날 이를 표본으로 삼고 다시 제작하여 갔다고 하며 그 위판을 장사굴에 보존한 교생(校生) 박무영(朴茂榮), 박대충(朴大忠), 이언복(李彦馥) 등 세 사람에게는 숭유정신(崇儒精神)의 귀감이 된다 하여 참봉 벼슬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계산동에 사는 도술 철학자인 박거사(朴居士)가 굴에서 도통(道通)하기 위해 장기간 수도한 곳이라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입구가 폭파되어 붕괴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주변에 자갈 무더기가 널려 있을 뿐이다.
한편 계양산에 열두 사찰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계양산은 한서(한강서쪽) 지방의 주산(主山)이다. 여러 산을 거느리고 있어 산군대(山郡帶)를 이루었다. 계양산에는 열두 개의 절이 있었다고 전하여지는데 그 절터를 살펴보면 남쪽인 부평읍 쪽에 2개소, 동쪽의 계양 지구에 1개소, 북쪽의 계양 방면에 6개소, 서쪽인 서곶 방면에 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여기 저기 절터로 보이는 곳이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및 『부평읍지』 등에는 계양산 서쪽에 만일사(萬日寺), 북쪽에 명월사(明月寺)가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다. 이 절 이외에 조선 중기 때 절이 너무 많아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된 이외의 절은 모두 왕명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쓸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금은 근대에 지어진 지선사, 성불사, 덕흥사, 백룡사 등이 계양산을 중심으로 남쪽과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계양산의 허함을 보강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오조산(五造山) 이야기도 전한다. 오조산이란 인공적으로 만든 조산이 5개 있었다는 의미이다. 옛날 어떤 지관(地官)이 와서 하는 말이 “부평의 풍수를 살펴보니 안산이 없어 계양산 정기가 새어나가니 만약 인공적으로라도 앞에 산이 있다면 큰 도읍지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평 주민들과 수령은 인공 동산을 축조할 계획을 세우고, 제1차로 두 개의 조산을 만들었고 제2차로 3개를 더 만들어 모두 5개의 조산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고지도에서도 조산이 표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고 다만 그러한 이야기를 기념하여 현재 오조산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끝으로 매 사냥에 관한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총이 없어 매사냥이 성행하였는데, 송도 한복판에 매방이 있었으나 민가의 닭과 개를 함부로 잡아 죽이는 터에 이런 일로 큰 비난을 받았다. 이때 이습(李褶)이라는 사람이 부하 박향(朴鄕)을 시켜 도성 안에 있는 매방을 다른 곳에 옮길 것을 지시하여 여러 곳의 후보지를 탐색한 결과 부평땅 경명현(景明峴) 부근이 적지라서 사육도가(飼育都家) 윤수(尹秀)로 하여금 매방을 이전하여 매를 사육하였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충렬왕은 왕자 시절 원나라에 볼모로 가서 매사냥을 배웠고 아주 즐겨했다고 하며 부평 매방에도 몇 차례 왕래한 기록이 나온다. 한번은 원나라 사신과 더불어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부평 땅에 와서 매사냥을 하며 즐겼는데, 이때 이습은 왕을 즐겁게 해주려고 윤수를 시켜 미리 고니와 따오기 깃털의 일부를 뽑아 높이 날게 하고 매를 시켜 이를 잡아오니 왕은 이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충렬왕은 이습을 총애하고 높은 벼슬을 내려주었으며 또한 부평골의 등급을 높여 길주(吉州)라 하고 자기가 죽으면 이 땅에 묻어 달라고까지 하였으나 아들은 이를 반대하고 다른 곳에 능을 썼다고 한다.
구의 남쪽 경계를 이루는 경인고속도로의 효성 · 작전동 일대에는 전자 · 섬유 · 식료품 · 기계 등의 공업이 집중적으로 발달해 있다. 공장지역의 북쪽으로는 시가지가 조성되어 서비스업과 금융업이 발달해 있으며, 주거지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인구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경인고속도로의 부평톨게이트를 통해 서울, 부천과 인천의 서구 및 중 · 동구 구도심지역으로의 접근성이 양호하며, 307번 국도를 통해서는 김포지역으로 직접 연결된다. 농촌경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구의 북쪽지역은 인천국제공항으로 연결되는 신공항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고 신공항철도도 운행 중에 있다. 그 노선과 나란히 경인운하 건설도 추진 중에 있다. 아울러 수도권외곽순환고속도로도 서울과의 접경 부근에 건설되어 있어 지역경관의 급속한 변모가 예상된다.
계양산을 중심으로 한 자연환경과 옛 부평도호부의 유적이 계양구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다. 일찍이 이규보는 계양산에 올라 부평과 서해안 일대의 풍경을 보고 감탄하였다. 역사적으로 계양산은 한강을 차지하려는 주체들이 서로 각축을 벌인 곳이기도 하며, 그러한 사실은 계양산성에서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계양산을 오르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자전거 경기장이 있는 곳에서 갈멜수도원 쪽으로 종주하는 것이다. 백룡사-계양산성-터 정자-봉수대-능선길-헬기장-정상-약수터로 이어지는 등산길을 말한다. 이 등산길 곳곳에는 역사 유적지가 흩어져 있어 확 트인 시가지 전망과 함께 계양산과 부평의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사적지 탐방도 계양구의 대표적인 관광코스이다. 계산동의 부평초등학교에는 부평도호부 청사 건물과 어사대, 욕은지, 은행나무 등이 남아 있다. 일제는 부평도호부 청사 터에 국민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청사 건물이 부평초등학교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어사대는 정조대왕이 이곳에 들러 활을 쏘았던 것에서 유래하는 유적이며, 욕은지는 인조가 장릉에 갈 때 잠시 들러 손을 씻었던 것에서 유래하는 연못이다. 이 외에 부평초등학교에서 경인교육대학교 방면으로 800미터 떨어진 곳에는 부평 향교가 자리한다.
효성동은 구한말 부평군 마장면 효성리 지역으로, 원적산 밑에 큰 벼랑이 있어 새벼리 또는 효성이라고도 불리었다. 1914년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고,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서정으로 개칭하였다. 1946년 효성동으로 개칭하였고, 1990년 효성 1·2동으로 분동하였다. 이 지역은 주택지역과 준공업지역이 혼재하며 경인고속도로 및 산업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또한 과거 수출 4공단에 관내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공장이 이전되면서 공동주택이 조성되어 최근 급격하게 인구가 유입되고 있다.
계산동은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그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에는 다시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대정정이라고 불리었던 지역이다. 계산동이라는 이름은 1946년 동명 개칭에 따라 붙여진 지명이다. 이 지역에는 부평향교, 부평도호부청사, 어사대, 욕은지 등 과거 부평도호부의 유적지가 다수 분포한다. 20세기 후반 이후 계산지구 택지 개발사업과 더불어 도시기반이 본격적으로 구축되었고, 현재는 주택 및 상업, 금융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구청,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 금융기관, 병원, 재래시장과 대형할인 매장이 인접해 있고, 외곽순환도로, 도시철도,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시 · 내외 접근이 용이한 지역이다.
작전동은 경인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부평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며 동쪽으로 작전서운동, 북쪽으로 계산동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이 지역은 중 · 소 영세공장이 있는 공업지역과 주거지역의 공존지역에서 점차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신축되어 주거지역으로 변모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세무서, 구의회, 파출소 등 각종 관공서가 밀집해 있으며, 최근 인천지하철 작전역세권을 중심으로 상업지역이 조성되고 있다.
한편 서운동은 1998년 10월 1일자 행정구역 변경으로 인해 서운동과 작전3동이 합쳐져 작전 · 서운동이라는 행정동에 편입되었다. 서운동은 도농 복합도시로서 농촌 경관과 도시적 시가지를 겸비하고 있는 지역으로서, 관내에 서울을 연결하는 경인고속도로, 산업도로 및 부평과 계산동을 연결하는 부흥로의 양호한 도로망이 통과하고 있어 교통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오늘날에는 대단위 아파트 지역, 농업지구 지역, 상업지구 지역, 중소기업체가 위치해 있는 경공업 지역으로 구성되어 복합적인 도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계양동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공항철도 계양환승역 및 귤현역, 경인운하(계획) 등 교통의 요지로서 무한한 개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다. 인천광역시 북부에 위치하여 수도와 인접한 전형적인 도농복합지역으로서 그린벨트와 군사시설보호구역 등 도시발전 저해요인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계양구 면적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앞으로 많은 발전가능성을 지니며 현재 대단위아파트 입주로 인하여 계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면적에 있어서 계양구 최대의 행정동이며, 도 · 농 복합 및 일부 군사시설보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곽 지역에는 관공서, 학교, 도서관, 금융기관, 재래시장 등이 산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