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남구와 부평구, 서쪽은 영종도, 남쪽은 연수구, 북쪽은 서구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21′~126°38′, 북위 37°22′~37°34′에 위치한다. 면적은 133.19㎢이고, 인구는 11만 449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1개 행정동(52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인천광역시 중구 관동에 있다.
인천광역시는 한반도 중서부 해안에 위치하기 때문에 높은 산지가 적어 대체로 구릉지나 평지가 전개되며 큰 하천이 발달하지 못했다. 관내의 도서에는 유인도 4개와 무인도 10개가 있는데 유인도 1개는 연륙도서이다. 인천의 산지는 대체로 남북과 동서의 방향성을 보인다. 중구 일대의 지형은 월미산(93m), 응봉산(69m), 수봉산(112m) 등 낮은 구릉성 산지가 동서로 펼쳐져 있고, 이 구릉지 사이로 싸리재고개, 도원고개(황골고개) 등의 교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수봉산 서편에 있는 자유공원, 송현동, 도림동 등은 해발고도 60m 내외이다.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에는 기상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서단의 월미산은 화강암 산지이다. 이 구릉성 산지들의 남쪽은 저지대로 대부분 해안매립에 의해 조성된 땅이며, 구 면적의 약 2/3를 차지하고 그 위에 항만시설이 입지해 있다.
중구의 소하천으로는 운북동의 동강천, 운남동의 전소천, 무의동의 무의천 등이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7℃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159.4㎜, 최대풍속 19.2%, 평균풍속 3.0m/s를 보이고 있다.
주로 섬 지역에서 신석기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내륙지역에서는 개발로 인해 찾을 수 없다. 중구의 영종도, 삼목도, 용유도, 무의도 일대에서 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관련한 유적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많은 신석기 유적이 확인, 조사되었다. 영종도에서는 송산유적, 눈들유적이, 삼목도에서는 삼목도(장안부락) 유적을 비롯한 약 10여 곳이 발견되었다. 용유도에서는 지표 · 시굴조사를 통해 여러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확인된 유구의 종류는 화덕자리(송산 유적의 18기, 삼목도 유적의 18기), 집터, 돌무지, 움집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많이 확인된 것은 화덕자리이다. 하지만 바닷가이면서 취사시설을 갖추고 있음에도 조개더미나 다른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청동기시대의 흔적으로 지석묘가 발견되었다. 학익동에 7~8기, 주안동에 2기, 문학동에 1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그 현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는 학익동 지석묘 2기와 주안동 지석묘 1기, 문학동 지석묘 1기뿐이다.
고려시대의 중구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확인하기 힘들어, 인천사 속에서 중구의 지역사를 가늠해 볼 수밖에 없다. 호족이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였던 나말여초를 지나면서 인천 지역에는 인주 이씨(仁州 李氏)가 대표적인 호족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인주 이씨는 그 시조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아찬의 벼슬에 있던 이허기(李許奇)로 전해내려 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를 성립할 수 있었듯이 인주 이씨 역시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천이씨세보(仁川李氏世譜)』에는 이허겸의 아들 눌(訥)과 손자 성간(成幹)이 있다. 성간의 부인은 개성 왕씨로서 아버지가 왕건이다. 당시 태조가 혼인관계를 통하여 강력한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하였던 점을 상기할 때 고려 초의 인주 이씨는 왕실과의 혼인이 이루어질 정도의 강력한 호족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주 이씨는 문종대에서 인종대에 이르는 7대 8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동안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시 고려 왕실의 왕자, 궁주 가운데는 인주 이씨의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인주 이씨는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벌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해주 최씨, 경주 김씨, 평산 박씨, 파평 윤씨, 강릉 김씨 등의 거족들과도 혼인관계를 맺어 일대 벌족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중구 역시 인천 전체의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조선 초기까지 인주로 불리던 인천은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으로 개정되었다. 그것은 태종이 지방제도 개편과 함께 군이나 현에 ‘주(州)’자가 들어 있는 고을을 ‘주’ 대신 ‘산(山)’이나 ‘천(川)’으로 고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인주가 인천군으로 개칭됨으로써 인천이라는 읍호가 역사상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1459년(세조 5)에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 때문이다. 정희왕후의 아버지는 파평 윤씨 번이며 어머니는 인천 이씨 문화의 딸이다. 즉 정희왕후의 내향이 파평이고 외향이 인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파평과 인천의 읍호가 승격되었다. 『세조실록』 권18, 세조 5년 10월 2일(경술)의 기록에 “정희왕후의 내향이라 하여 원평부(原平府)를 승격시켜 파주목으로 삼았다.”는 기록과 세조 5년 11월 5일(계미)에 “자성왕비(정희왕후)의 외향인 인천군을 도호부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 도호부로 승격된 후 인천은 조선 후기까지 도호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편 지금의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주변에는 군사 진지였던 제물량(濟物梁)이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의 하나인 제물포의 기원이 된다. 제물량은 조선 초 태종 때 군사제도를 정비하며 설치한 것이고, 종 4품인 만호가 이곳을 담당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인천군 서쪽 15리에 제물량이 있다.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萬戶)가 있어 지킨다.”는 표현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제물량 영은 인천부 서쪽 19리 되는 곳에 있으며 수군만호 1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 초부터 한양으로부터 가까운 해안의 수비를 위해 이곳에 군사 진지를 설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세종실록지리지』의 자료를 자세히 보면, 성창포는 지금의 인천항 일대를 아우르는 지명이었으며 제물량은 인천항에 있던 작은 나루였음을 알 수 있다.
제물량 영 같은 수군 진지는 해안 방어뿐 아니라 조운선(漕運船)을 호송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인천 앞바다와 강화도 일대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삼남(三南) 지방의 곡식을 서울로 운반해 올리던 중요한 해상교통로였다. 이들 세곡(稅穀) 운반을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 초에 남양부 화양만에 경기 수영(水營)을 두고 그 산하에 영종진(永宗鎭), 제물진(濟物鎭) 등의 여섯 개 진지를 두었다. 조선 중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보강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이들 6개 진지도 변화를 겪는다. 이때 화성군 남양면에 있던 영종진이 1653년(효종 4)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왔다. 이로써 당시까지 자연도(紫燕島)라 불리던 섬이 영종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에 1656년(효종 7)에는 제물진이 강화로 이전해 감에 따라 그 뒤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제물포는 한적하고 조그만 어촌과 포구로 남게 되었다.
중구는 우리나라의 개화기를 가장 앞장서서 겪은 곳이다. 개화기 이전 인천의 치소는 남구의 문학동, 관교동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현 중구 지역은 변두리의 한적한 포구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 뒤 우리나라 개화기의 역사는 1883년(고종 20) 인천항의 개항에 이어 인천항을 중심으로 한 중구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중구에는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에 해당하는 역사가 많다. 최초의 서구식 공원, 최초의 근대적 기상대, 최초의 해외 이민, 최초의 무선 전신 등 이곳에서 시작된 일들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구는 오늘날 인천을 가리키는 이름 가운데 가장 대표적으로 쓰이는 ‘제물포(濟物浦)’가 있던 장소이다. 현재 제물포는 남구 도화동의 경인전철 역사 제물포역 주변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지만, 원래의 제물포는 지금의 인천항 주변 중앙동, 항동 일대에 있던 작은 포구를 지칭하던 지명이었다. 그 지명의 범위가 조금 넓어져 인천항 개항 이전 지금의 중구 관내 대부분이 속해 있던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 지역과, 지금은 동구 관내로 들어간 다소면 고잔리, 송림리, 장천리 일부 등을 통틀어 제물포라 부르기도 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1877년부터 3년 동안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서해안의 답사와 측량을 벌였고, 이를 토대로 일본은 인천만 제물포를 개항장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로써 개펄과 얕은 구릉지에 초가 몇 채가 있을 뿐이었던 당시의 제물포는 서울과 가깝다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급성장하게 되었다. 개항과 함께 제물포에는 현재의 중구 내동에 자리한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가 설치되었다. 감리는 부사(府使)가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방 행정을 비롯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외교와 세관 업무까지 처리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또한 감리서 안에는 경찰서와 감옥이 설치되어 사법권까지 관장했다. 이 같은 인천감리서의 설치는 그 이전까지 지금의 관교동에 있던 인천부 청사의 기능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인천 지역의 행정 중심이 남구 일대에서 중구 쪽으로 옮겨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82년 ‘조 · 일 수호조규속약’ 이후 제물포에는 응봉산 일대에 조계(租界)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열강들 사이에 본격적인 각축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계는 19세기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양에 진출하며 무력을 앞세워 통상 조약을 맺고 개항장에서 자신들이 주권을 행사하며, 이권을 확보해 나가기 위해 만든 교두보적 성격의 지역을 말한다. 제물포의 조계는 지금의 자유공원과 중구청 주변 15만여 평에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 지금의 중구 지역에는 대부분 동 이름이 없었다. 이 때문에 조계가 들어서면서 이들 지역은 ‘○○거류지(居留地)’ 제○호 또는 해안통(海岸通), 청관통(淸館通), 공원지통(公園地通), 이사청통(理事廳通), 민역소통(民役所通) 등으로 분리되어 불리었다. 이중 가장 먼저 조계를 설치한 것은 1883년 9월 ‘조선국인천구조계약서(朝鮮國仁川口租界約書)’를 맺은 일본이었다. 일본 조계지는 지금의 관동 12가와 북성동 13가 일대 7,000평에 자리했다. 청국은 일본보다 한 해 늦은 1884년 4월에 조계를 설치하였는데, 청국의 조계라 해서 청관(淸館)이라 불리었으며 현 선린동 일대 5,000여 평에 자리 잡은 뒤 지금까지 한국의 유일한 차이나타운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청국과 일본은 각자의 조계를 가졌으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은 1884년 10월 지금의 송학동 13가, 북성동 13가 일부, 송월동 2~3가 일대 14만 2000여 평에 공동으로 넓은 각국 조계를 만들었다. 이들은 ‘신동공사(紳董公司)’라는 공동 관리 기구를 만들어 공동 조계 내의 모든 문제를 협의하고 결정해 나갔다. 특히 건물을 지을 때 자재로는 벽돌, 석재, 철재를 꼭 써야하는 규칙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제물포 앞 바다에는 1911년 사도(沙島)에서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밑에 이르는 해안 사이를 매립하고, 이곳에 4,500톤 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크기의 인공 항만 축조를 시작했다. 이 항만은 최초의 근대적 갑문식 도크 공사로 착공 7년여 만인 191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이 외에도 제물포 내동에는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가 세운 ‘내리교회’ 사택에 1893년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이었던 영화학당이 설치되었다. 내리교회의 2대 목사였던 존스(G. H. Jones)는 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102명을 모아 인천항에서 하와이로 이민을 보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1885년에는 제물포와 서울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육로 전선이 개통되었고, 1910년에는 월미도 해안을 순시하며 세관 감시 업무를 하던 ‘광제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 전신이 시작되었다. 1888년에 만국공원(萬國公園) 또는 각국공원(各國公園)이라는 이름으로 완공된 지금의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었으며, 이 공원 북쪽 언덕에 자리 잡고 1905년부터 업무를 시작한 인천기상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기상대였다. 외국인 조계가 있던 자유공원 일대는 1914년 이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도시계획이 시행된 곳이었고, 여기에 적용된 건폐율이나 미관지구 개념은 1930년대 이후 전국 주요 지역의 도시 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1945년 8·15광복 후 1949년 8월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인천부가 인천시가 된데 이어, 1962년 5월에는 시 조례에 따라 중부출장소가 생겼다. 그리고 1968년 1월 1일 법률 제1919호에 의해 동구, 남구, 북구와 함께 중구가 탄생하였다. 이때 북부출장소 관할이었던 송월동이 중구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 7월에는 동구에 속해 있던 월미도가 중구로 들어왔다. 1981년 인천시가 직할시가 되면서 경기도에서 분리되었고, 1989년에는 경기도 옹진군에 있던 영종도와 용유도가 편입되어 영종동과 용유동이 되었다. 2001년 3월에는 영종도에 신공항이 개항되었다. 영종도와 용유도는 본래 인천부 영종면과 용유면이었는데, 1914년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부천군에서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던 지역이다. 중구는 그 뒤 1995년 3월 1일 법률 제4789호에 따라 인천시가 광역시로 개청되면서 인천광역시 중구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동 1가 9번지에 있는 구청 청사는 원래 인천시청 청사가 있던 곳이다.
1990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용궁사는 중구 운남동에 있다. 이 사찰은 영종도 백운산 기슭 평평한 대지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문무왕 1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백운사(白雲寺)라 하였다고 전하며 일명 구담사(瞿曇寺)라고도 한다. 1854년(철종 5)에는 흥선대원군이 중창하여 용궁사라 개칭하고 고종이 등극할 때까지 이 절에서 칩거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영종도의 중산 월촌에 사는 윤공이란 어부가 꿈을 꾼 뒤 바다에서 작은 옥불을 어망으로 끌어올려 이 절에 봉안하였다고 하며 현재 그 옥불은 없고 모조 옥불을 모시고 있다. 경내의 관음전(觀音殿)은 맞배지붕, 홑처마 건물로서 옥석(玉石)으로 된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으나 일제 때 도난당하고 현재는 후불탱화를 배경으로 한 관음상이 걸려 있다. 경내입구의 대방(大房) 정면에는 용궁사(龍宮寺)라는 대원군의 친필현판이 걸려있다. 이밖에 절 뒤에는 높이 11m에 달하는 미륵불이 있으며 칠성각 앞에는 수령 1,300여 년 된 고목이 서 있다.
1981년 사적으로 지정된 답동 성당은 건평307.2평의 단층 벽돌조이며, 1933년 착공하여 1937년 준공되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구)일본제일은행인천지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이 있고, 인천우체국(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구)인천일본58은행인천지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 인천내동성공회성당(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 구)인천일본18은행인천지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 구)제물포구락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가 있다.
송학동에는 200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홍예문이 있는데, 이 문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중앙동, 관동 등에 있던 일본 거류민들이 급격히 증가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뚫은 돌문이다.
이 외에 내동에 인천감리서지가 있으며, 전동에는 전환국지(典還局址)가 있다. 북성동 1가 3번지(현 인천역)는 경인 철도 시발지이다.
근대교육기관으로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포교의 수단으로 1892년에 선교사가 설립한 인천영화여학당(仁川永化女學堂)과 영화학당이 중구 내동에 위치하고 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14개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중구문화원이 송학동 1가에 있고, 공연시설로는 돌체소극장이 경동에, 그리고 코스모스 유람선 내 공연장이 북성동 1가에 있다. 기타 복지시설로는 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이 내동에 있고, 공동도서관으로서 인천시립도서관이 중구 율목동에 있다.
대개의 자연마을에서는 전통적으로 동제를 지내왔다. 동제는 당제, 당고사, 도당제, 도당굿의 ‘당굿’ 계통과 산제, 산신, 산고자, 산치성 등 ‘산신제’ 계통으로 나뉜다. 당제 계통은 과거에 도당굿을 거행했으나 지금은 간소하게 제의를 치르는 마을과 유교적인 형식과 무속(巫俗)의 형식이 혼합된 제의를 지내는 것으로, 중구 영종동 중촌 마을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산신제 계통은 예전부터 유교식 제사를 치렀거나 도당굿을 유교식 제례로 바꾼 내륙의 농경지대에 주로 분포한다. 영종동 구읍 마을의 경우가 이에 해당하는 곳으로 확인된다.
당제는 도시화와 함께 거의 사라졌다. 영종동 용수말, 젖개, 송산, 마장포, 세모리 마을, 덕구봉, 삼목, 예단포과 용유동 거잠포, 나룻개, 늘목, 수문터 등은 중구 지역의 대표적인 당제 마을이었지만 수 십 년 전부터 더 이상 제의를 지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당집을 다시 짓거나 제산을 새로 쌓는 곳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우 제의는 노인회에서 주관하는 경우가 많으며 제사 비용도 마을 기금이나 기부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현재에도 중구 영종동의 중촌과 구읍 마을에서는 각각 산신제와 도당제를 행하고 있다.
영종도 용수동에는 큰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이 마을 농민들이 모두 이 물로 농사를 지었다. 이 연못은 이 마을 차부자의 것이었다. 차씨는 부자였으나 인색하기로 유명했다. 하루는 떠돌이 중이 이집 대문 앞에서 목탁을 치며 시주할 것을 빌며 염불하였는데 한참 후에야 차씨가 나와 중보고 호통을 치며 시주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중이 말하기를 “그러면 물이라도 한 그릇 달라.”고 하였더니 차씨는 쇠죽을 쑤는 바가지를 주며 “저 아래 우물이 있으니 가서 떠먹어라.”하는 것이었다. 중은 우물에 가서 물을 떠먹는 시늉만 하고는 돌아 와서 차씨에게 쇠죽 쑤는 바가지를 돌려주고는 “지금도 귀댁은 부자이지만 저기 보이는 연못을 메워 논을 만들면 더 큰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색하고 구두쇠인 차씨는 그 중의 말에 “과연 그럴 만한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인부를 시켜 연못을 메워 논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연못 속에서 살고 있던 용이 먹구름을 타고 팔미도 쪽 바다로 날아갔다. 그 후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가 나서 차씨 집은 물에 휩쓸렸다. 결국 차 부자는 망해버리고 마을 이름은 용수동이 되었다 한다.
한때 영종도에 영종진 방어영에 군인이 상주하였다. 영종진영은 첨사, 첨제사방어사 등이 군을 통솔하였는데 참모는 호군이었다. 한 호군에게 어여쁜 소실(첩)이 있었는데 그는 차차 소실에게 정이 멀어졌고 그 소실은 슬퍼하며 자기 남편이 근무하는 영종 진영을 찾아가서 진영 앞에 있는 태평암이란 바위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시체를 찾는 사람이 없어 조수에 밀려 용유도 포구에 떠다녔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시체가 호군의 소실임을 알고 건져다 묻어 주었다. 그 후로 태평암을 선녀암이라 불렀고, 용유도포구의 고개를 호군의 소실을 묻었다고 해서 호군재라 불렀다고 한다.
옛날 영종도 운묵마을 예단포에 어민 손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연평도에 출항해서 조기잡이를 했는데 때마침 그물에서 돌부처가 걸려 나왔다. 그래서 그는 돌부처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그 바다에서 조기잡이를 하는데 조기는 잡히지 않고 역시 돌부처가 다시 걸려들었다. 이번에도 “재수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돌부처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날 밤이었다. 손씨의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 돌부처가 또다시 걸릴 것이니 그 돌부처를 영종도 구읍 태평암에 안치하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니나 다를까 그물을 올리니 과연 그 돌부처가 그물에 걸려 나왔기에 꿈의 현몽대로 태평암에 세워 놓았다. 그 후 영종도 방어영 군졸들이 이 돌부처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기고 활로 쏘며 장난을 하였는데 그때 돌부처의 한쪽 팔에는 약병이 들려 있었다. 그 때문은 활을 쏜 군졸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운사 주지는 그 돌부처를 자신의 절로 모셔 갔다.
그로부터 백운사에는 돌부처에 기도하는 신도들이 매일 수없이 모여 들었다. 또 돌부처에 기원하면 모두가 소원 성취하였다고 한다. 이 돌부처가 오래도록 백운사에 안치되었다가 일제 때 주지가 어느 중에게 팔았다고 전해올 뿐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인천 내항을 둘러싸고 있는 중앙 · 관동 일대에는 항만 관련 업무시설, 금융기관, 중구 행정관청 등이 밀집해 있다. 이곳에서 동인천역을 잇는 도로를 따라 자리 잡은 신포 · 인현 · 내경동 일대는 상업기능이 특화되어 인천의 중심지가 되어 왔는데, 1970년대 이후 주안 및 간석 · 구월동 지역이 새로운 중심지가 되면서 주요기능이 이전되고 인구가 감소하는 등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인천의 구중심지였던 이 일대는 도로가 협소하고 주거 밀집도가 높아 재개발 필요성이 높은 지역으로 상주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중구의 서쪽, 내항 바깥에 위치한 월미도 매립지 일대의 북성동 지역에는 항구 접근성이 요구되는 제당 · 목재 · 합판 · 조선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내항의 남쪽에 매립된 땅인 항동에는 연안부두가 있어 연안해운의 중심기능을 담당하며, 종합어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오늘날 토지이용은 농경지가 23.1%, 대지 및 공장용지가 6.7%, 임야가 46.5%, 도로용지가 3.9%를 차지한다.
이 지역의 교통망은 구릉지를 따라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대체로 불규칙한 패턴을 보인다. 1899년에 완공된 경인선 철도는 월미도 입구, 인천역이 종점이며, 중구 관내에 동인천역, 도원역 등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역과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을 잇는 수인선 철도는 신포역과 인천역이 중구를 지나고 있으며, 인천역이 수도권 전철 1호선과 연결되어 있다. 인천항은 1918년에 최초의 갑문식 독이 완공된 이후 계속해서 항만시설이 확충되어 서해 제일의 국제무역항으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500톤 급 이하의 소형 어선 및 연안여객선은 내항 바깥 연안부두에 접안할 수 있도록 항만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영종도와 용유도를 연결한 대규모 매립지에 건설한 인천국제공항은 21세기 세계 항공교통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연륙도로를 통해 인천 및 내륙지역이 연결되어 있다.
월미도는 원래 풀밭으로만 이루어진 섬이었다. 지금은 그 중간 해변을 육지와 맞닿도록 폭넓게 메워서 이름만 ‘섬(島)’ 자가 붙어있을 뿐 육지화되어 있다. 월미도가 유원지로 개발된 것은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다. 1918년 인천부는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지정한 뒤 조탕과 해수욕장, 유희장, 오락장, 식물원, 용궁각 등의 시설을 조성해서 여름이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피서를 즐겼다. 지금은 월미산과 놀이동산, 문화의 거리, 카페와 횟집들이 월미도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자유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1897년에 세워진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보다 9년 앞서서 세워졌다. 서양인들이 조성한 공원이라 애초에는 ‘만국공원’이라고 불렀다. 일제는 한때 이곳을 ‘서공원’이라 불렀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을 세우면서 공원 이름도 자유공원으로 바꾸었다. 시가지 일부와 항만시설 그리고 서해바다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공원이다. 봄에는 벚꽃축제가 열린다.
차이나타운에는 예부터 전국적으로 이름난 청요리집들이 있었다. 공화춘이나 중화루가 그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정통 청요리를 맛보기 위해 인천에 몰려들기도 했다. 우리나라 자장면이 시작된 곳도 바로 공화춘이다. 이곳에는 당시 웅장했던 옛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어 화려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이 일대에 최근 그 시절의 맥을 잇는 청요리집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30년 전통의 풍미와 옛 중화루 주방장의 손자가 운영하는 자금성, 그리고 대창반점, 상원 등이 그것이다. 해마다 이 거리에서는 세계 원조 자장면 맛보기 행사가 열린다.
신포동은 ‘인천의 명동’이다. 격식을 갖춰야 할 자리에서 입어야 하는 정장으로부터 멋쟁이 소리를 들을 만큼의 인상적인 패션에 이르기까지 신포동 패션 거리에 가면 만나지 못할 유행이 없다. 옷은 물론이고 구두, 액세서리, 가방, 미용실까지 그리고 고급브랜드부터 캐주얼, 보세전문점까지 이 거리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오늘의 유행이 한눈에 보인다. 특히 최근에는 인천항을 드나드는 외국인들의 발길이 신포 문화의 거리까지 이어져, 그들을 상대로 하는 전문매장이 속속 들어서면서 이국적인 풍물을 보여주며 퓨전식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신포동은 1947년 사동, 신생동, 답동, 신포동이 통합되어 만들어졌고, 1998년에는 중앙동을 통합하였다. 신포동은 한국 근대화와 관련된 국가유산이 다수 분포하는 산교육의 장이며 그것은 오늘날 지역관광 벨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또한 대중국 교역항으로서 인천의 중심이자 상업과 금융의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연안동은 1985년 11월 15일 중앙동에서 분동하였으며, 1995년 1월 1일 인천광역시 중구 연안동으로 개칭되었다. 연안동에는 종합어시장을 비롯하여 바다와 접하고 있는 명소인 연안친수공원 등이 있으며, 또한 이곳은 다양한 먹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해양 접경지역으로서 수산물 집산지이고 황해권의 관문인 동시에 관광특구 지역이기도 하며, 국제여객터미널을 비롯한 주요 항만 시설이 입지해 있다. 또한 수출입항 기지로서 산업중심지이며 해양관광도시의 잠재력을 내재하고 있다.
도원동은 원래 다소면 장천리의 일부와 독각리(獨脚里)의 일부를 합하여 1906년 5월 도산리(桃山里)로 있었던 지역이다. 1912년 5월에는 도산리 일부가 부도정(敷島町)에 편입되었고, 1914년 10월 1일 인천시 부제 시행시 인천부에 편입되어 도산정(桃山町)이라 불리다가 광복 이후 1946년 1월 1일 도원동으로 개칭되었다. 도산 혹은 도원이란 옛날 이곳에 복숭아밭이 널리 분포하였던 데에서 기원하는 지명이다. 오늘날 도원동은 대부분 주택 지구를 중심으로 한 시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1968년 신흥 1, 2동으로 편제되었고 1983년 11월에 신흥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98년 10월 신흥동과 신선동을 신흥동으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인천 개항과 더불어 시가지화 된 지역으로 인천의 구도심권에 해당한다. 시가지는 대부분 인천항에 인접된 산업 지역이며, 도시 교통과 산업 기능의 요충지이다. 보세 창고와 정미소가 밀집되어 있으며 공유 수면 매립으로 조성된 신개발지가 이 지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율목동은 1977년 5월 10일 유동(柳洞)과 율목동(栗木洞)을 합쳐 만들어졌다. 이중 유동은 인천부 부내면 우각면에 속하였는데, 경인선 철도가 우각리 한복판을 관통하면서 현재 동구의 창영동과 유동으로 분리된 것이다. 유동은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드나무골, 버들골, 또는 유목동(柳木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한편 율목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율목리 지역으로 밤나무가 많은 데에서 밤나무골 또는 율목리라 하였다. 이곳은 부내면 사무소의 소재지이기도 하였으며 개항 당시 부촌(富村)으로 알려져 있었다. 관내에 율목공원이 있으며 그 뒤편에는 시립도서관이 위치한다. 그 밖에 기독 병원과 정보산업고등학교 등이 있으며 구도심권의 주거환경 밀집지역이다.
동인천동은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 화리 및 내리, 외리, 용리가 있었던 곳으로 1998년 10월에 동인천동으로 통합 · 개칭되었다. 이곳은 경인전철이 통과하는 교통중심지이며 인천 서부도심권의 상권 중심지, 월미 관광 특구의 중심지이다. 문화, 관광, 쇼핑, 먹거리 등 생활 및 여가 공간이 밀집되어 있고, 인천 개항과 근대화 시발 지역으로서 인천의 전통적 명문학교와 우리나라 최초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위치한다. 그 밖에 관공서, 학교, 병 · 의원 등 다중 이용 시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며 인천시 학생교육문화회관이 있어 청소년 문화 활동의 중심지로도 기능하고 있다.
북성동은 예로부터 어선이 드나들어 북성포라 불리던 지역으로 1946년 동명 개정 때 북성동으로 명명되었다. 1977년 5월 중국인 거주지역인 선린동과 통합하여 북성동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선린동은 원래 청국의 조계지로서 일제시대에는 지나정이라고 불리었고 광복 이후에는 친선적인 의미에서 선린동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북성동에는 차이나 타운이 존속하고 있으며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위치해 있다. 북성동은 자유공원과 월미산을 축으로 하여 차이나타운, 인천항, 문화의 거리 등이 조성되어 있어 관광개발의 잠재력이 풍부한 곳이다. 송월동은 북성동의 차이나타운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송월동은 1903년 부내면 만석동(萬石洞)이었던 지역으로 1946년 이후 송월동으로 개칭되었다. 송월동은 구도심의 가옥 밀집지역으로 전철권 및 해안, 공원 등에 인접하여 있다.
영종도는 옛날 자연도라고 불렀던 섬으로 현재 행정구역상 영종동과 용유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도(紫燕島)라는 지명은 송나라 때 서근이라는 대신이 영종도 경원정에 들렀을 때 푸른 하늘에 제비들이 떼 지어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제비가 많은 섬이라 하여 자연도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영종동은 중산동, 운남동, 운서동, 운북동 등 4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인도 2개, 무인도 5개의 섬을 관할하고 있다. 영종동에 인접한 용유동은 관광단지 조성사업 지역으로서 수산양식장과 자연휴양지, 을왕리해수욕장, 선녀바위 외 7개소의 유원지를 포함하고 있다. 영종도는 2001년 3월 27일 인천국제공항 개항과 더불어 서해안시대 요충지로서 태평양의 거점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