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구(인천광역시) (())

인천광역시 남구청
인천광역시 남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인천광역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인천광역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동구, 서쪽 및 남쪽은 중구, 북쪽은 서구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24′~126°42′, 북위 37°29′~37°38′에 위치한다. 면적은 24.84㎢이고, 인구는 40만 489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1개 행정동(7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다.

자연환경

지형은 남쪽 연수구와 경계를 이루는 문학산의 줄기가 동서로 뻗어 뚜렷한 산줄기를 형성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다. 표고 분석에 의하면 0~50m의 평지가 88.26%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은 문학산으로 높이는 해발 213m이다. 미추홀구는 대체로 평야로 구성된 지역이다.

주안동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는 승기천 일대는 하천과 조류에 의해 퇴적된 평야지역이었는데, 현재는 하도가 직선화되어 있고 주변 토지는 공업 및 상업용지로 바뀌고 있다. 경인고속도로 가좌인터체인지에서 간석동까지 이르렀던 과거의 갯골은 미추홀구의 북쪽 경계를 이룬다. 이 일대 간석지는 간척에 의해 염전과 농경지로 활용되다가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과 더불어 공업단지로 변모되었다.

전체적으로 미추홀구의 자연 경관은 평탄한 평지에 구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수봉산이 중심에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인천시의 상징인 문학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용현 5동과 학익 1동 방향으로는 황해와 인접한 해안지역이라 할 수 있다. 주요 산으로는 수봉산(115m)이 구의 중심에 위치하고 문학산(213m)이 문학동과 연수구 선학동 사이에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84℃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144.5㎜이다.

역사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곳곳에서 발견된 유물, 유적들로부터 입증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27년 미추홀구 학익동의 옛 소년교도소 서쪽 언덕 위에 있던 고인돌이다. 이것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발굴했는데, 당시 이곳에서 발굴된 3기의 고인돌은 넓은 탁자 모양으로 그 안에서 토기 조각과 돌화살촉, 돌칼, 숫돌 등의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고인돌은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지배 계층의 무덤이므로, 당시 이곳에 많은 구성원을 갖춘 부족공동체가 살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고인돌은 이곳 외에도 미추홀구 주안동 신기촌 일대와 도화동에서도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 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많은 부족들이 남구 일대에 거주하였음을 알려준다.

미추홀구는 인천 지역 중 처음으로 사서(史書)에 기록된 인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비류왕(沸流王)이 바로 그 인물이다. 아버지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고, 동생은 백제를 세운 온조왕(溫祚王)이다. 비류는 미추홀(彌趨忽)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미추홀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있지만, 대체로 지금의 인천을 가리킨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현재 문학산에 있는 문학산성은 비류가 처음 인천에 자리를 잡고 도읍을 만들기 위해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추홀 고성 또는 남산 고성으로도 불린다.

『여지도서』에는 “문학산이 곧 미추왕의 고도(古都)”라는 표현이 나오며 『동사강목』에도 “전하는 바로는 문학산 위에 비류성 터가 있고 성 안에 비류 우물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997년 인천시의 「문학산성 지표조사」에 따르면 이곳에 남아 있는 토성과 석성의 축성 기법, 발견된 유물의 내용 등으로부터 이곳의 토성이 삼국시대 초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나 문헌 기록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비류 백제는 건국 10여 년 만에 망하고 그 백성들은 온조가 세운 백제에 귀속되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비류계와 온조계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력 집단이 별개로 성장했다가 이 시점에서 하나로 통합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미추홀구에 관한 구체적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인천 전체의 역사 속에서 가늠할 수 있다. 호족이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였던 나말여초를 지나면서 인천 지역에서는 인주 이씨(仁州 李氏)가 대표적인 호족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인주 이씨는 그 시조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아찬의 벼슬에 있던 이허기(李許奇)라 전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를 건국하였던 것처럼, 인주 이씨 역시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천이씨세보(仁川李氏世譜)』에는 이허겸의 아들 눌(訥)과 손자 성간(成幹)이 확인된다. 성간의 부인은 개성 왕씨로서 그 아버지가 왕건으로 되어 있다. 당시 태조가 혼인관계를 통하여 강력한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하였던 점을 상기할 때, 고려 초의 인주 이씨는 왕실과의 혼인이 이루어질 정도의 강력한 호족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주 이씨는 문종대에서 인종대에 이르는 7대 8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동안 인주 이씨는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시 고려 왕실의 왕자와 궁주 가운데는 인주 이씨의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인주 이씨는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벌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해주 최씨, 경주 김씨, 평산 박씨, 파평 윤씨, 강릉 김씨 등 거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인천 지역의 거족이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는 미추홀구가 확고한 인천의 중심지로 떠오른 시대였다. 그것은 1460년(세조 6) 이곳에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던 것에서 시작된다. 인주 이씨의 득세로 고려 후기에 영화를 누렸던 인천은 조선 건국 이후 인천군(仁川郡)으로 지위가 낮아졌다. 그러나 세조는 인천이 자신의 어머니이자 세종의 비(妃)였던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진외가(陳外家) 지역이라 하여 이곳을 다시 승격시켜 인천도호부로 만들었다. 소헌왕후는 청송 심씨로 아버지의 외가가 지금의 관교동 일대에 살았던 인천 문씨(仁川 門氏) 집안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인천도호부의 청사가 있던 곳은 바로 지금의 미추홀구 관교동 47번지 문학초등학교 자리이다.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 따르면 객사 30칸, 동헌 10칸, 내동헌 33칸, 사령청 9칸, 군관청 7칸, 옥사 4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읍지에는 또 당시의 인천부 인구가 2,615호(戶)로 남자 4,533명, 여자 3,466명 등 모두 7,999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사의 남쪽에는 청량산과 문학산이 있고, 북쪽에는 주안산이, 북동쪽에는 소래산이 둘러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를 마주보고 있었다. 관아에서 동쪽으로 경신역(慶信驛)을 가면 그곳에서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안산(安山)과 금천(衿川)으로 가는 육로가 있고, 북쪽으로 소래산을 끼고 성현(星峴)을 넘으면 부평에 이르며, 이를 통해 서울로 가게 되어 있었다. 또 서쪽으로 가서 제물포 나루에 닿으면 영종도나 강화도로 가는 배를 탈 수도 있는 등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였다. 청사 안에는 군기청 옆에 대지(大池)라 불리던 인공 연못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어진 상태에서 새로 복원되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도호부 청사 터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문학산 기슭에는 지금도 인천향교가 자리 잡고 있다. 유교를 보급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만든 향교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사상이 건국이념이 되자 항교가 더욱 장려되었다. 이곳 인천향교가 처음 지어진 연대와 장소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최항(崔恒)의 중수기(重修記)로 미루어볼 때 1398년(태조 7) 경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남아 있는 향교 건물은 전란으로 불탄 것을 숙종 대에 다시 중건한 것이라 한다.

구한말까지 인천도호부의 부사(府使) 중에는 선조 대의 임영로(任榮老), 인조 대의 이행건(李行健), 영조 대의 조재박(趙載博) 등과 같이 선정을 베풀어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올라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반면 성종대의 윤인(尹璘)처럼 백성들의 호응을 받지 못해 도중에 물러난 사람도 있다. 그들 중에는 수년 전부터 인천시가 ‘안관당제(安官堂祭)’라는 행사를 조직하여 추모하고 있는 김민선(金敏善) 부사도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로 있다가 병사하였는데, 세간에는 그가 문학산성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왜군을 막아낸 것으로 전해오고 있고 최근 인천시의 추모 행사는 그러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조선시대 미추홀구의 역사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수십여 년 전까지 ‘낙섬’이라 불리며 온전히 남아 있었던 원도(猿島)의 존재이다. 조선시대에는 명산이나 대천 및 바다에 나라와 고을의 안녕을 빌고 복을 구하는 제사를 지내왔다. 바다의 경우 인천과 순천, 강릉 등지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중 인천도호부에서는 원도에서 서해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원도는 섬의 형태가 원숭이 모양이어서 지명이 그렇게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매립되거나 도로 개설로 잘려 나가 그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원도는 인천도호부 서쪽 12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섬 가운데 여러 섬의 신(神) 제단(祭壇)이 있는데 봄, 가을에 악(岳), 해(海), 독(瀆)에 제사를 지낼 때 수령이 친히 행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보면 인천 앞바다에 원도가 표시되어 있고, 1937년 일제가 관광객들을 위해 만든 지도 『경승(景勝)의 인천』에도 이 섬의 존재가 나타나 있다. 『인천부읍지』에는 원도에 대해 “부에서 서쪽으로 12리에 있는데 뭇 섬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고, 봄, 가을 두 차례 제사지낼 때 지방의 수령이 참여하였지만 지금은 폐지된 지 일곱 번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원도에서의 제사는 1800년대 중반쯤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자 정부는 개항장인 중구에 인천부의 행정을 맡는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하고 부(府) 청사의 소재지를 미추홀구 관교동에서 중구 내동으로 옮겼다. 그 뒤 1903년에는 개항장 일대만을 관할하는 부내면이 새로 설치되면서 미추홀구 지역은 수 백 년 동안 누려온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중구로 완전히 넘겨주게 된다. 이어 1914년 3월에는 부령 제111호에 따라 인천부의 일부와 부평군 전체, 남양군 일부, 강화군 도서 일부를 통합해 부천군이 신설되는데, 이때 인천부 구읍면(舊邑面)과 서면(西面)이 합쳐져 문학면(文鶴面)이 되고, 사소면과 주안면이 합쳐져 그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다주면(多朱面)이 생겼다. 이때 지금의 미추홀구 일대는 대부분 문학면과 다주면 일대에 속하게 된다. 관교동, 문학동, 학익동은 문학면의 일부로 들어갔고, 주안동과 도화동, 용현동, 숭의동은 다주면의 일부로 들어갔다. 그 뒤 이들 행정 구역은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며 8·15광복을 맞게 된다.

1947년 4월 미군정은 인천부 주안 지청을 설치하여 도화 1동 등 9개 동을 관할하게 했다. 이것은 곧 이듬해인 1948년 8월 남동, 문학, 주안출장소 등 3개 출장소가 공식 출발하는 것으로 이어져 오늘날 미추홀의 기틀이 된다. 이들 3개 출장소는 1956년 11월 남부, 남동, 문학, 주안출장소로 분할되었다가, 1967년 3월 법률 제1919호로 「인천시 구(區)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된 뒤 1968년 1월 1일 하나로 합쳐졌으며 이때 남구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남구의 지명에는 주안과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이름인 ‘제물포(濟物浦)’가 생겨났다. 제물포는 원래 중구 중앙동과 항동 일대에 있던 포구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넓은 의미에서는 자유공원 일대를 중심으로 중구와 동구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고, 그 포구가 있는 동네 이름은 흔히 선창리(船倉里)로 불리었다. 그러나 1963년 1월 당시의 경인철도 숭의역이 제물포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 이름이 그 뒤로도 계속 쓰이면서 이제는 그 역사(驛舍)가 있는 미추홀구 도화동 일대를 제물포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1970년 1월 시 조례에 따라 4개 동이 나뉘어져 미추홀구는 모두 28개 행정동을 갖게 된다. 이는 인천시의 시세 확장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1985년 11월 인천시 조례에 따라 다시 2개 동이 분동되어 모두 40개 행정동을 거느리게 된 남구는 지역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판단에 따라 결국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으로 신설된 남동구에 13개 동을 떼어 주었다. 그 뒤로도 미추홀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고 인천시가 광역시로 개칭된 1995년 3월 1일에는 연수구가 신설되면서 남구에 속해 있던 8개 동이 분리되었고, 남구에는 23개 동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1996년 3월 관교동과 문학동이 나뉘어졌고 결과적으로 오늘날에는 모두 24개의 행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유물 · 유적

문학동에 있는 인천향교는 공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및 중국의 성현을 모시는 제사기능과 지방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기능을 수행했던 전통 교육기관이다. 주요 건물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 우리나라 및 중국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 서 양무, 교육생들의 강당인 명륜당, 유생들의 처소인 동, 서 양재 등이 있다. 이 향교는 15세기 중반에 중수(重修)되었다고 전하나 현재의 주요 건물들은 조선 후기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한 20세기 중반에 실시된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삼문 등 일부 건물이 크게 보수되었다. 대성전(大成殿)은 공자 이하 중국 20성현을 배향한 곳으로서, 부연을 단 겹처마 박공지붕의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이다. 기둥머리 사이에는 창방을 걸고 가운데 화반을 얹어서 장혀와 도리를 받고 있다. 이런 형식은 조선 후기 익공계 건물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대성전 뒷면 좌우측에는 우리나라 역대 성현을 배향한 동무 및 서무를 배치하여 문묘(文廟) 공간을 이루고, 내삼문을 지나면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로 이루어진 교육시설이 있다. 건축양식은 팔각지붕인 명륜당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모두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용현동에는 이윤생 · 강씨 정려가 있다. 이윤생(1604∼1637)은 인천에 세거해 온 부평 이씨의 후손으로 궁술과 마술에 뛰어나 충무위부사과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윤생은 의병을 모집하여 원도(현 낙섬)에 들어가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이르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며 이튿날인 1월 24일에는 약탈을 일삼는 청병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1월 25일 다시 청의 대군이 침입하자 사력을 다해 방어하였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지고 이를 눈치 챈 청병이 일제히 섬 안으로 침입하였고, 이윤생은 최후까지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전사 소식을 들은 부인 강씨는 곧 바다에 몸을 던져 의절함으로써 1861년(철종 12) 4월 13일 정려가 내려지고, 이윤생은 최승지에, 부인 강씨는 숙부인에 각각 추증되었다. 현재 용현동에 위치해 있는 정려에는 이윤생과 그의 부인 강씨를 기리는 정려문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문학동 산 27번지 일대에는 문학산성(인천광역시 기념물, 1986년 지정)이 있다. 이 산성은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 정상부분에 축조된 석성으로 미추홀 고성, 남산성 등으로 불리고 있다. 『동사강목』, 『여지도서』에 의하면 문학산은 미추왕(비류)의 도읍지로서 석성터가 있고 성내에는 비류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축조형식은 퇴뫼식 석성으로서 내 ·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내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성의 규모는 토축 내성의 둘레가 100m, 석축 외성의 둘레가 200m로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특히 정상부분에는 약 5m의 석축을 쌓았다고 전하나 현재는 대부분의 성벽이 붕괴되었다. 『인천부읍지』에는 임진왜란 때 부사 김민선과 김찬선이 고성을 중수하여 주민들을 이끌고 왜군을 격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학산성은 인천항에서 동남쪽으로 약 10㎞ 정도 떨어져 있고 문학산 정상근처에 오르면 인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동인천역에서 4번 버스를 타고 문학동방면으로 가다가 문학고개에서 내린다. 정상 부근에는 군부대가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된다.

문학동에는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다. 인천도호부청사의 정확한 건축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강희맹이 쓴 『인천부승호기』에 의하면 1424년(세종 2)에 이미 청사가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건축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을 조선 초기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객사지붕의 기와에서 “강희 16년(1677년)”이라는 명문이 나온 것을 볼 때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천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1460년(세조 6)으로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세종비)의 진외가이기 때문이었다. 『인천부읍지』에 따르면 인천도호부에는 객사, 동헌, 내동헌, 삼문, 사령청, 향청, 군관청, 훈무당, 옥사, 어용고, 군기청 등 원래 15∼16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객사(客舍)의 일부와 19세기 초 건물인 동헌(東軒) 및 후대에 세워진 창고만이 남아 있다. 인천도호부청사의 정확한 건축 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지붕기와에서 발견한 강희맹이 쓴 명문(銘文)에 의해서 1677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현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이전 개축하였기 때문에 당초 건물들의 배치 ·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객사는 원래 20칸 규모였다고 전하여지나 현재는 양쪽 익랑채가 없어지고 박공지붕으로 된 중앙부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동헌은 합각지붕의 굴도리집으로서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 지붕을 하고 있으며 둥근기둥이 아닌 네모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서 1990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인천향교가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과 최치원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학자들에 대해 제사를 지내고, 가정과 국가를 이끌어 가는 기본 이념으로서의 6례(六禮)를 가르쳤다. 서당을 나온 양반 자제들은 여기에서 생원과 진사 시험을 보고, 공부를 계속하여 과거를 준비했다. 특히 향교에서의 제사는 조상 숭배와 함께 유교적 신분 질서를 확인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인천의 유림(儒林)은 물론이고 지역 내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인천향교는 구한말 이른바 신학문이 들어오면서 다른 곳의 향교와 마찬가지로 점차 사회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잃어갔다. 1941년 일제는 한 곳의 부(府) 안에 두 개의 향교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인천 향교에 있던 위패를 태우고 문서와 비품은 부평향교로 옮긴 뒤 이곳을 폐교시켰다. 인천향교는 광복 후인 1946년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인천향교 주변에는 사설 교육기관인 학산서원(鶴山書院)도 있었다. 지금의 삼호현(三呼峴)에서 학익동 방향으로 조금 내려간 자리에 있던 이 서원은 1702년(숙종 28) 세워졌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 따라 철거되었다. 그 규모는 향교와 비슷했던 것으로 전하며 임금이 친필로 쓴 현액을 내려준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다. 이곳에서는 조선 중기에 인천부사를 지낸 이단상(李端相)과 그의 아들 이희조(李喜朝)를 모셨으며,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지역 내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도서관으로서 기능하였다. 지금은 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구한말에 이르면 「외국어학교관제」가 공포됨에 따라 1895년 주안동에 관립한성외국어학교(官立漢城外國語學校) 인천지교(仁川支校)가 세워졌는데, 이곳이 인천고등학교 전신이다. 또 용현동에는 1899년 사립일신학교가 개교했다. 특히 용현동에는 고등교육기관으로 1954년 인하대학(仁荷大學)이 설립되어 1972년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했다. 그 밖에 인천전문대학과 용현동의 인하공업전문대학이 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2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15개교, 인하공업전문대학, 인하대학교, 청운대학교 인천캠퍼스가 있고, 특수목적고등학교로는 한진고등기술학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미추홀학산문화원이 용현 5동에 있고, 공연시설로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 구월동에, 인천문화회관이 숭의 4동에, 인천음악문화원이 주안 1동에,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구월 2동에 각각 있다. 전시시설로는 인하대학교박물관이 용현동에, 송암미술관이 학익동에 있다. 문화교육시설로는 미추홀구여성인력개발센터가 숭의동에, 인천광역시 여성복지관이 주안 6동에, 인천광역시 청소년회관이 숭의 1동에 있다. 체육시설로는 인천광역시 종합경기장이 숭의 1동에, 인천문학경기장이 문학동에, 인천문학야구장이 문학동에 각각 있다. 기타 복지시설로는 인천종합사회복지관이 학익 1동에, 미추홀종합사회복지관이 주안 5동에 있고, 공공도서관으로서 주안도서관이 주안 4동에 있다.

민속

미추홀구에는 불교 무용인 범패와작법무(바라춤)가 2002년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바라춤은 작법의 하나로 양손에 바라를 들고 빠른 동작으로 전진후퇴, 회전을 하며 활발하게 추는 춤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도량을 청정하게 하며 마음을 정화하려는 뜻에서 춘다고 한다. 춤의 종류는 천수(千手) 바라춤, 명(鳴) 바라춤, 사다라니(四茶羅尼) 바라춤, 관욕게(灌浴偈) 바라춤, 먹(막)바라춤, 내림(來臨) 바라춤 등 6가지가 있다. 무복(舞服)은 하얀 장삼에 녹색 띠를 두른 복식과 두 손에 바라를 들고 장중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몸을 놀리는 이 춤은 색감(色感)과 움직임이 모두 들뜨지 않는 속에서 화려함을 끌어낸다. 발은 왼편으로 돌되 언제나 ‘고무래 정(丁)’ 자(字) 형태로 떼어놓고 무릎과 허리를 동시에 굴절시키며 바라를 놀린다. 무릎과 허리 놀림이 덩실덩실하고 발놀림이 또박또박 장중하다. 바라를 맞부딪치거나 비벼서 내는 소리가 춤의 리듬 속에 장중한 멋을 더해 주며 바라가 지닌 쇳소리는 종이나 요령처럼 쨍그랑거리지도, 징처럼 크지도 않으면서 부드럽다. 최근 속화(俗化)되어 임의로 무대에 올려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반염불 굿거리 장단을 쓰기도 한다.

이 외에 은율탈춤이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황해도 은율지방에서 전래된 은율탈춤은 봉산탈춤, 강령탈춤과 함께 해서탈춤에 속하며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에 행하는 민속가면극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탈춤은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탈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하며, 19세기 중엽 조병모, 박동환, 박원식, 박남상 등 유명 연희자들에 의해 구체적인 체계를 갖춘 놀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춤의 구성은 사자춤, 헛목(일명 상좌)춤, 팔목중춤, 양반춤, 노승춤, 미얄할미영감춤 등 6개 과장(科場: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출연 인원은 대략 22명이며, 공연 시 사용되는 악기는 피리, 젓대, 북, 장고, 해금, 새납(호적), 징, 꽹과리 등이다.

설화 · 민요

학익동에서 문학산으로 넘어가는 얕은 고개를 대천이 고개라 부른다. 고개 입구에는 옛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처럼 보이는 큰 반석이 놓여 있어 도천(禱天) 고개라 불렀고, 이것이 대천이 고개로 변형된 것이다. 그러나 이 반석은 명과 청나라에서 몰래 사람을 보내어 인천 땅의 기운을 끊어버리기 위해 설치했다는 전설이 있다. 즉 기혈을 끊기 위해 쇠기둥을 박은 다음 그 자리를 반석으로 눌러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비류 백제 건국, 이자겸, 이인로, 대각국사 의천 등 인천에서 많이 나왔던 인물이 그 후 더 이상 배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문학산 봉수대 밑에는 안관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안관당은 임진왜란 때 지혜와 계략으로 왜군과 싸워 인천을 지킨 인천부사 김민선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다. 김민선은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 왜적과 싸우다 1593년 병으로 순절했는데 죽어 혼령이 되어서도 문학산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병란이 있을 때마다 목마를 타고 창과 칼을 휘두르며 만학산 주위를 돌아다니며 어리석은 후손들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에도 마을 노인들의 꿈에 크게 노한 김민선이 자주 나타났다고 전한다. 이런 까닭에 마을 사람들은 김민선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가 순국한 문학산성 위에 사당을 짓고 김민선 내외의 목조상을 모셔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산업 · 교통

IMF 경제 위기 이후 미추홀구의 광공업 사업체수는 증가하였지만 종사자수나 생산액은 뚜렷한 증가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부가가치액의 경우는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미추홀구 소재 제조업의 소규모화 및 생산성 저하로 제조업 기능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천광역시청이 있던 구월동은 시청사 이전으로 인해 공공행정, 교육서비스업 등 중심 기능들이 약화되고 있고, 반면에 주거 기능을 지원하는 보건, 사회복지사업 및 미추홀구문화를 창출하는 오락, 문화 및 운동 관련 서비스업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또한 교통상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운수업과 통신업이 크게 증가하여, 앞으로 전통 제조업 중심에서 문화산업, IT, 물류업 중심으로 전환할 것이 기대된다.

주안국가산업단지(수출산업공단 6공단), 인천지방산업단지, 인천기계지방산업단지가 입지하고 있으며, 이 공단지역은 미추홀구 면적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공단 내 산업은 조립 · 금속, 기계, 목재, 화학 등 2차 산업이 중심이 되고 있으며, 기타 기계 및 장비, 영상, 음향 및 통신장비, 조립금속, 화학물 및 화학제품, 목재 등이 높은 고용비중을 보인다. 그 밖에 미추홀구의 상업시설로 대표적인 것은 시장과 대규모 소매점이다. 2008년 현재 일반시장은 20개소, 백화점 2개소, 쇼핑센터 1개소가 있다.

광역 교통망 중 광역철도인 경인전철이 주안역, 도화역, 제물포역을 따라 미추홀구의 동서를 횡단하고 있다. 경인전철은 근대화 과정에서 역세권 형성 등의 경제적 부흥을 가져온 부의 유산이었지만, 현재는 이동의 편리성이라는 측면보다는 도시 공간을 분절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어 도시 균형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인천2호선 지하철이 통과하고 있다. 미추홀구를 통과하는 지하철 노선은 인천가좌역과 석바위시장역 사이 구간이다. 미추홀구를 횡단하는 고속도로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로부터 서울특별시 양천구를 연결하는 경인고속도로와, 인천광역시 중구로부터 경기도 안성시를 연결하는 제2경인고속도로가 있다. 미추홀구는 이처럼 광역교통망의 동서 간 횡단에 의해 남북분절의 문제를 보이고 있다. 이는 도시 균형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통과교통에 의한 교통량의 증가로 도심교통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관광

관광 명소로는 인천도호부청사와 인천 향교 외에 수봉공원, 송암미술관, 학산문화원, 문학경기장 등이 있다. 수봉공원은 공원 자체가 문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5월의 장미로가 유명한데, 이곳을 산책하는 것은 이 공원을 찾는 즐거움이고 어린이 놀이터와 궁도장 등 다양한 레저시설이 있어 운동을 위해 찾는 이들도 많다. 공원 안에는 2002년 10월에 개관한 국악회관과 문화회관이 있어 공연을 감상할 수 있고, 민속공연이 열리는 전통 민속놀이 마당도 있다. 공원 내의 은율탈춤전수관에서는 무형유산 공연이 연중(상반기: 6∼7월, 하반기: 9∼10월) 행해진다. 특히 현충탑과 인천지구 전적 기념비, 재일학도의용군 참전 기념비 등 호국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고, 실향민이 제사를 드리는 망배단이 있다.

송암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전시실과 야외 전시장에 도자기, 불상, 고서화, 목판, 고대 중국 유물 등 3,000여 점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도자기, 회화류는 시대별, 분야별로 소장하고 있어 그 분야의 연구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근처 10분 거리에 인천시립박물관,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모여 있어 미술관 관람 후 들려볼 수도 있다. 중구에 위치한 월미도와 연안부두 등도 15~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다.

한편 학산문화원은 2004년 10월 7일 산하에 소극장을 개관하였다. 문화원의 이름을 딴 학산소극장은 인천에서 유일한 연극 전용 공간으로 연극에 필요한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최대 140명의 관객이 함께 즐길 수 있다. 1980년대의 인천은 소극장 전성시대였다고 할 만큼 적지 않은 소극장들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소극장은 몇 개 되지 않으며 경제성이 보장되는 어린이극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 연극을 위한 전용 소극장은 없다. 이 점에서 학산문화원은 연극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문학경기장은 인천광역시청에서 남측으로 2.5㎞ 지점에 위치하여 신도심 녹지축의 구심적 역할을 하는 체육공원으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부지 남측으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통과하며 도시철도 1호선 문학경기장 역사가 위치하여 대중의 접근성을 높임으로 시민들에게 근린생활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경기장은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가는 범선의 모습에서 서해안의 관문이자 국제무역의 중심항구인 지역적 정체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건축적 모티프(motif)를 반영하고 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돛과 돛대를 형상화한 지붕은 대지의 능선과 어우러진 구조위에서 자연스런 고저차를 지님으로 역동적 이미지를 나타낸다. 그 밖에 한국적 곡선미를 살리기 위해 강재(steel) 사용을 최소화한 순수 케이블 구조 시스템의 적용으로 전통적인 처마곡선을 표현하고 있다. 경기장의 특징은 체육행사 뿐만 아니라 집회 및 공연 등의 종합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가지며, 2002년 월드컵 경기 이후 다양한 기능을 부여하여 시민의 휴식과 여가 문화를 만들어 내는 공간으로 조성되고 있다.

동(洞)
  1. 숭의동

숭의동이란 광복 이후 ‘의’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숭의동은 인천항이 개항되던 1883년 독갑다리가 세워졌던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독갑다리란 큰 독에 흙을 채워 교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1916년까지 34년 동안 이용되었던 다리이다. 이곳은 인천부 감리서가 있던 인천의 중심가로부터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오늘날 숭의동 로터리를 중심으로 전문 공구 상가와 재래시장이 입지해 있으며 인천광역시 종합운동장 및 체육회관 위치해 있다.

  1. 용현동

용현이란 현재의 용현동 앞 바다에서 장마 때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인천 개항 당시까지는 수봉공원의 기슭 아래로 뻗은 능선을 따라 초가집이 드문드문 있었다고 하며, 1960년대까지 인천시의 변두리 지역에 해당하던 한가한 지역이었다. 경인고속도로 개통 이후 크게 시가지화 되었으며, 수봉공원의 인접지역으로 전형적인 주거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1. 학익동

학익동은 문학산의 한 줄기인 학익산 아래에 위치한다. 학익산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학익동의 원래 이름은 학골이며, 조선 숙종 때 이곳에 자리를 잡은 부평 이씨 문중에 제운 선생이라는 덕망 있는 학자가 있어 제운리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에는 학산서원이 설립되어 구한말까지 기능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학익초등학교 자리에 학림사라는 사찰도 있었다고 한다. 구한말 부천군 문학면 학익리였다가 1936년 인천부에 편입 되었으며, 1956년 11월 23일 남부 출장소 관할에서 1968년 1월 1일부로 구 설치에 따라 남구 관할로 변경되었다. 오늘날에는 학익 1동과 2동으로 분동되어 있다.

  1. 도화동

도화동은 원래 베말, 쑥골, 도마다리 등으로 불리다가 1903년 8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확정할 때 화동(禾洞), 도마교리(道馬橋里)로 개칭되었다. 1914년 11월 20일에는 도화리로 개명되었으며, 1946년 1월 도화동(道禾洞)으로 이름 붙여졌다. 화동(禾洞)이란 ‘벼 마을’, 도마교리란 말이 지나다니는 ‘다리 마을’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1968년 1월 1일 구제 실시에 따라 인천시 남구 도화동으로 개칭되었다가, 1981년 7월 1일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인천직할시 남구 도화동으로 되었고, 1995년 1월 1일 부로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인천광역시 남구 도화동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도화 1, 2, 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주안동

주안은 주안산(朱雁山)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안산은 산의 흙색이 붉고 형태가 마치 기러기가 내려앉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경인선 철도가 개통될 때 주안역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며 또한 주안염전이 있었던 데에서 그 지명이 유래한다. 1914년 3월 1일 부천군 다주면 토총리로 불리다가, 1936년 4월 1일 주안정으로,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에 주안동이 되었다. 1968년 1월 1일 구제 실시로 인천시 남구 주안동으로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인천광역시 남구 주안동으로 변경되었다. 오늘날에는 행정동으로 주안 1, 2, 3, 4, 5, 6, 7, 8동이 분동되어 있다.

  1. 관교동

관교동(官校洞)이라는 지명은 관청과 향교가 있는 관청리라는 뜻에서 생긴 명칭이다. 이 지역은 인천도호부 청사가 있었고 인천향교를 비롯해 지방지정 기념물인 문학산성, 학산서원터, 하늘에 제를 올리던 수천현 고개, 삼호현(三呼峴: 능허대를 거쳐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일행을 전송하던 고개로 전송객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사신일행을 크게 세 번 불렀다는 곳)이 있으며 600년생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 유적의 고도(古都)이다. 이곳은 인천의 구읍으로 1914년 부천군 문학면 관교리로 되었다가 1936년 인천부에 편입된 후 1946년 행방직후 관교동으로 개칭되었다.

  1. 문학동

문학동은 관교동과 함께 문학산에서 유래된 인천부의 소재지로서 인천의 뿌리가 서려 있는 곳이다. 1927년에 발굴된 지석묘로 미루어 볼 때 이곳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배후의 문학산은 미추홀 왕국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문학동은 옛날에 성촌(城村), 남산(南山)으로 불리어 오다가 1903년 8월 서촌산성리(西村山城里), 남산리(南山里)로 구분되었고, 1906년 5월에는 산성리(山城里), 학산리(鶴山里), 1914년 11월 20일에는 학산리, 문학리로 되었다가 광복 이후 문학동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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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도시, 인천』(인천발전연구원, 2006)
『인천시의 이모저모』(인천광역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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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와 문화』(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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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86)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지방행정구역요람』(내무부,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지방행정지명사』(내무부, 1982)
『도서지(島嶼誌)』(내무부, 1973)
남구(namgu.inche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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