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과 남쪽은 경기도 시흥시, 서쪽은 미추홀구 및 연수구, 북쪽은 부평구 및 경기도 부천시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41′~126°47′, 북위 37°22′~37°27′에 위치한다. 면적은 57.01㎢이고, 인구는 53만 1395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9개 행정동(11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에 있다.
북쪽과 동쪽으로 만월산, 철마산, 거마산이 부평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바다와 접한 소래포구 및 106만 평 규모의 광활한 해양생태공원 조성지가 있다. 남동쪽으로는 수인산업도로를 경계로 경기도 시흥, 부천과 접해 있다. 녹지가 전체 구면적의 54%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산으로는 상아산(151m), 거마산(206m), 오봉산(106m), 만수산(201m) 등이 있으며, 주요 하천으로는 승기천, 만수천, 장수천, 운연천(이상 지방 2급 하천), 기타 소하천으로 소구월천, 소곡천, 걸재천, 음실천, 구룡천이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58℃이고, 기온의 연교차가 심하며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편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472.5㎜를 보이고 있다.
삼국시대의 남동구는 주요 교통로로서의 기능이 강했다. 당시 지금의 수원 쪽에서 중림역(重林驛)∼대야원(大也院)~나진(羅津)을 거쳐, 부평의 경명현(景明峴)을 넘고, 다시 한강 하류를 지나 개성으로 갔다. 이때 중림역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지역으로 구한말까지 인천 땅이었던 소래(蘇萊)에 속해 있었고, 대야원은 소래산 아래에 있던 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도로와 역원제도가 한층 확립되어 신라시대에 있던 역과 간선도로가 많이 정비되었는데, 이중 한강 남쪽에서 수도인 송도(松都)로 가는 길에 중림역과 경신역(慶信驛)이 있었다. 경신역은 지금의 수산동 경신 마을 일대에 있던 역이었다. 이 역은 비교적 소규모의 3등 역이어서 말은 모두 6필 밖에 없었지만 역의 노비는 66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중림역과 경신역은 그 뒤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는데, 『인천부읍지』에도 “중림역은 인천부에서 동쪽으로 33리에 위치하였고 찰방(察訪) 1인이 근무하였다. 본도(本道)에 속한 역이 여섯인데 경신, 반유, 석곡, 금륜, 종생, 남산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인천에서 부평이나 한양으로 갈 경우 사람들은 대개 이곳 남동구 지역을 거쳐 다녔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처럼 인천부의 제물포나 문학산 주변에서 성현(星峴)을 넘어 부평 및 한양으로 가는 길이 그것이었다. 성현은 지금의 만수동에 있는 고개로서 비리고개, 비루고개 또는 별리현(別離峴)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성현에서 멀지 않은 장수동에는 무네미고개라고도 불리는 수현(水峴)이 있다. 수현은 조선 중종 때의 권신인 김안로(金安老)가 삼남(三南) 지방에서 서해를 통해 올라오는 세곡(稅穀)을 한양까지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한 수로(水路)를 만들기 위해 이른바 굴포 운하를 파다가 실패한 일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 전해진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남동구는 인천부의 변두리 지역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문헌상 그리 많은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기록으로 볼 때 현존하는 문서 가운데 남동구 지역의 방리(方里)가 기재된 가장 오래된 책은 1789년(정조 13년)에 국책 사업으로 호구 조사를 진행한 후 발간한 『호구총수(戶口總數)』이다. 이 책에 기록된 인천부의 면(面)은 모두 16개 면인데, 이중 남촌면(南村面)과 조동면(鳥東面)이 대략 오늘날의 남동구 지역에 해당한다. 이 책에 따르면 남촌면에는 14리가 있었고, 호수는 359호, 인구는 1,418명(남자 630명, 여자 788명)이었다고 한다. 남촌면은 대략 지금의 고잔동, 남촌동, 논현동, 도림동, 수산동 지역에 해당한다. 조동면은 13리가 있었으며 호수는 233호, 인구는 703명(남자 315명, 여자 388명)이었던 것으로 적혀 있는데, 지금의 만수동, 서창동, 장수동 일대에 해당한다.
1843년에 발간된 『경기지(京畿誌)』 인천 편에는 남촌면에 냉정리, 능동, 논현리, 도림리, 고잔리, 사리동, 여무실리, 경신리, 염촌, 발리동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조동면에는 상리, 수월리, 일리, 담방리, 동촌, 설래리, 상음실리, 하음실리, 연락동, 만의리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많은 지명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인천부읍지』에도 “남촌면은 관문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으며 염촌(鹽村)으로는 냉정리, 능동, 논현리, 도림리 등이 있다. 오봉산에는 고잔리, 사리동, 대무실리, 발리동, 경신리 등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서 관문이란 인천부 청사가 있던 관문을 지칭하므로 현재의 관교동, 문학동 일대를 말한다. 또 조동면에 대해서는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노상리, 수월리, 일리, 담방리, 동촌, 설래리, 상음실리, 하음실리, 연거동, 만의리 등이 있다.”고 쓰여 있다.
한편 오늘날 인천을 대표하는 주요 지명 가운데 하나로서 주안(朱安)이라는 이름이 있다. 지금은 경인전철 주안역과 주안동에서 ‘주안’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주안산(朱雁山)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남동구가 그 이름의 기원이다. 주안산은 이제 없어져 쓰이지 않는 이름이지만 지금의 간석동에 있는 만월산(滿月山)을 가리킨다. 이 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 ‘주안산(朱岸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흔히 글자 그대로 ‘흙이 붉고(朱) 기러기(雁)가 내려 않은 모양’이어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요컨대 주안이라는 지명의 원조는 남동구 간석동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구월동, 십정동, 가좌동 일대를 두루 가리켜 쓰였던 것 같다.
1914년 3월 일제는 부령 제111호에 따라 부천군을 새로 만들었는데 현재의 남동구는 대부분 부천군으로 편입되었다. 일제는 일천부의 일부와 부평군 전체, 남양군 일부, 강화군 일부 섬 지역을 통합해서 만든 행정구역이었다. 일제는 부천군을 만들면서 이전의 15개 면을 통폐합하였는데, 남동구 지역은 이중 다주면(多朱面)과 남동면(南洞面)에 속하였다. 다주면에는 구월동, 간석동 지역과 함께 지금의 미추홀구에 속하는 주안동, 도화동, 용현동, 숭의동 일대, 부평구의 십정동 지역까지 포함되었다. 다주면이란 이전의 인천부 다소면(多所面)과 주안면(朱安面)을 합하고, 두 곳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그 후 1921년 지금의 남동 공단이 있는 논현동과 고잔동 일대 해안에는 300정보 넓이의 남동 염전이 생겨 1980년대까지 60여 년 동안 존속하게 되었다.
이곳 염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인 주안염전이 생긴 뒤 국가적 차원에서 근대적 방식의 염전을 계속 확장시킨 정책에 따라 생긴 것이다. 당시 정부는 남동염전뿐만 아니라 경기도 시흥 지역에 군자염전을 만들었다. 특히 인천 지방에 염전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1932년에 이르면 남동염전을 비롯한 전체 1,115정보의 인천 관내 염전에서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인 15만 톤을 생산하였다. 오늘날 인천에 남아 있는 ‘짠물’이라는 지명은 그로부터 유래하며, 1937년 개통한 수원~인천 간의 수인선 철도 역시 소금을 많이 실어 날라 흔히 ‘소금 열차’라 불리었다. 수인선은 남동염전의 남쪽 해안을 매립하고 소래에 철교를 놓아 만든 것으로 애초부터 열차는 남동, 소래, 군자염전을 경유하도록 설계되었고, 실제로 이들 지역의 소금을 운반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편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생긴 부천군 다주면은 1937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없어지는데, 이때 일제는 주안의 표기를 이전의 주안(朱雁) 또는 주안(朱岸)에서 지금과 같은 주안(朱安)으로 바꾼다. 그 이유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설에는 ‘주(朱)’자에 ‘안대평 외산교(安垈坪 倭散橋)’의 ‘안(安)’자를 붙여 만든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안대평은 지금의 간석동과 십정동 일대가 바다였을 때 이들 지역을 연결해주던 다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부대 일부가 김포를 건너 부평을 점령하였는데, 당시 2만여 명에 달했다는 왜군은 부평의 옛 성을 수리해 그곳에 주둔하며 인근 마을을 노략질하다가 인천부까지 침입해 왔다. 이때 왜군들은 문학산성을 지키던 조선군을 얕잡아 보고 싸움에 임했다가 참패를 당했는데, 그 싸움터가 안대평 다리였다고 한다. 그 뒤 이 다리는 ‘왜군들이 싸움에 지고 흩어졌다[倭散]’고 해서 왜산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인천부읍지』에도 그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동면에 이어 1940년에는 남동면이라는 지명 역시 부천군에서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없어졌다.
1945년 광복 후 남동구 지역은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인천시 남동출장소가 설치되면서 그 관할 구역이 되었다. 1968년 1월에는 구(區) 설치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인천시가 중, 동, 남, 북구 등 4개 구를 설치해 시 전역을 나누었고, 이때 남동구 지역은 남구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래포구가 새우젓 시장으로 점차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까지도 한산하기만 했던 소래포구는 1974년 인천항의 내항이 완공되면서 새우잡이를 하는 소형 어선들이 내항에 출입하기 어렵게 되자 그 대안으로 이곳 소래포구가 일약 새우 파시(波市)로 유명해졌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주말마다 관광객을 포함해 1만 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포구 안에 북적거렸던 소래포구는 여전히 남동구의 명물로 남아 있다.
1981년 7월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된 뒤 남구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이 무렵 그 동안 남동염전이 있던 논현동과 고잔동 일대 해안에 남동공단 조성 계획이 추진되었다. 남동공단은 서울과도 가깝고 인천항을 통한 수입 물량 처리에 유리하다는 지리적 이점을 배경으로 1980년 7월 공단조성계획이 확정되면서 추진되었다. 남동공단은 공유 수면 매립에 의한 280만 9497㎡에 염전과 농지 등을 포함해 모두 956만 5536㎡를 대상으로 계획되었다. 그리하여 남동공단은 현재의 남촌, 도림, 논현, 고잔, 동춘동 등 5개 동에 걸치는 대규모 국가 공단이 되었다. 남동공단이 추진되는 사이에 인구가 늘어난 남구는 1988년 1월 대통령령 제12367호에 따라 남동구와 남구로 나뉘어졌다.
남구에서 분구된 남동구는 기존의 남동출장소 관할 지역과 구월동, 간석동, 남촌동 전 지역에 선학동, 연수동, 동춘동 일부 지역을 포함해 관할하게 되었다. 특히 1984년 구월동 1138번지 일대에는 인천광역시청 청사가 건립되면서 중구로부터 이전했다. 이는 남동구 일대가 인천의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동구는 남구에서 분구된 뒤 5개월 만인 1988년 5월 1일 지방자치법 개정 법률 제4004호에 따라 자치구로 승격하였다.
분구 당시 13개 동이었던 남동구에는 1989년 5월 만수 4동이 신설되고, 1990년 1월에는 간석 4동이 새로 생겨 모두 15개의 행정동이 되었다. 1991년 8월에는 구월 3동, 남촌동이 잇달아 신설되었으며, 1992년 1월에는 남동공단을 관할하는 남동공단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3년 12월에는 구월 4동과 만수 4동이 신설되어 남동구는 모두 20개의 행정동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98년 11월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수동과 서창동이 장수 · 서창동으로 합쳐진 것을 비롯해, 남촌동과 도림동이 남촌 · 도림동으로, 논현동과 고잔동이 논현 · 고잔동으로 각각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남동구는 현재 통합된 이들 3개 동에 구월 14동, 간석 14동, 만수 1~6동을 합쳐 모두 17개의 행정동을 갖게 되었다. 지역적으로는 남동공단과 같은 공업 지역과 소래포구와 같은 어촌 지역, 시청과 종합문화예술회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개발 상업 · 행정 · 문화 지역, 수산동과 도림동 등지의 농촌 지역 등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
1990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김재로묘(金在魯墓)가 남동구에 있다. 김재로는 숙종 대의 인물로 문과에 급제하여 겸설서(兼說書)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간 후 부재학,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등 내외 주요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현재 운연동 만의골 입구 동산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에는 호석을 두른 봉분과 묘비, 상석, 망주석, 석구 한 쌍 그리고 장명등이 있으며 주위에는 곡장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시립박물관에는 그의 51세 때의 모습과 36세 때 모습을 그린 영정 2폭이 보관되어 있다.
도림동에는 1990년 기념물로 지정된 조정만묘(趙正萬墓)가 있다. 조정만은 송준길 문하에서 수학하여 숙종 대에 진사시에서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는 윤증이 송시열을 배반한 사건에 대해 성균관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그 후 관직에 나아가 경향(京鄕)의 주요 관직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현대 도림동에 위치해 있는 그의 묘역에는 사성이 쌓아져 있고 묘비,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운연동에는 2002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이여발묘(李汝發墓)가 있다. 이여발(1621∼1683)은 조선의 무관으로 효종 대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비변랑(備邊郞), 도총사(都摠事)를 거쳐 숙천(肅川) 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라는 송덕비가 세워진 인물이다. 분묘의 형태는 호석이 없는 봉분 앞에 비석과 상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문인석 한 쌍이 세워진 평범한 묘제를 취하고 있다.
논현동에 있는 논현포대(論峴砲臺)는 198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있다. 이 포대의 설치배경은 병인양요 ·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경기 연안의 군비강화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가 해안을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외세를 사전에 방어하기 위해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경기 연해의 군사시설을 확충토록 함으로써 1879년에 축조되었다. 포대 축조 후 이 포대는 인근에 설치되었던 묘도포대, 제물포대 등과 함께 화도진에 소속되었으나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면서 이 포대도 폐쇄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논현동에는 2001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장도포대지(獐島砲臺址)가 있다. 장도포대는 1879년(고종 16) 일본 측이 서해안을 측량하면서 개항지를 탐색하는 것을 보고 인천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할 것을 대비하여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가 인천과 부평 연안에 화도진을 설치하고 포대를 만들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서, 1999년 『화도진도』의 원본 확인을 통해서 이곳에 3혈(穴)의 포대를 설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반사람들에게는 댕구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도포대지는 소래포구에서 시흥시로 이어지는 소래철교 서북쪽의 끝, 협궤철도 남쪽 변에 위치하고 있다.
논현동에는 남동문화원이 있으며 구월동에는 가천박물관이 있다. 가천박물관에는 대방광불 화엄경정 원본(권 제31)을 비롯해 모두 14건의 국가유산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복지시설로는 만수종합사회복지관이 만수 1동에, 만월종합사회복지관이 만수 3동에 있다. 구월동에는 인천광역시 중앙도서관이 있고, 간석동에는 한국여성문화원이 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7개교, 중학교 22개교, 고등학교 16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
장수동 만의골, 수현 마을, 남촌동, 도림동 등에 도당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소멸된 상태이다.
간석동에는 뱀으로 망해버렸다는 주안사(朱雁寺)에 관한 전설이 있다. 경인국도로 서울을 향해 가다가 원통이 고개에 이르면 오른쪽 주안산(朱雁山) 기슭에 약사암(藥師庵)이라는 절이 있다. 이 약사암은 최근에 창건한 절이지만 이곳에서 산 정상부를 향해 올라가면 주안사(朱雁寺)의 절터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제9권의 「불자조(佛字條)」를 보면 “주안사는 주안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주안사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절터에서 채집된 자기편(磁器片)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말기로 추측되고 있다. 이 주안사는 약 150년 전까지도 법당의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당시의 주지가 선행을 하지 않고 간악한 행위만 하였기 때문에 일순간에 뱀 떼가 나타나서 이 절을 망쳐 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요승(妖僧)이 나와서 주안산 줄기의 기(氣)를 죽이는 부적을 붙였다는 부적바위도 있다.
논현동(論峴洞)에는 호구포(虎口浦)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온다. 논현동은 옛날에 사신들이 외국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가족들과 ‘이야기하며 넘는 고개’라 하여 논현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논현동 근처 호구포를 속칭 ‘범아가리’라 부른다. 호구포 뒷산의 오봉산 기슭에는 오봉산에 있는 다른 돌과는 색다른 바위가 하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호구(虎口) 모양을 한 그 바위를 마을 수호신처럼 여겼다고 한다. 호구포는 인천의 최남단인데 들을 건너면 남쪽이 경기도 안산이다. 오봉산에 있는 호구암(虎口岩)은 안산에 있는 산(山)과 마주 대하고 있다. 그런데 안산 쪽의 산에는 세도가(勢道家)의 산소가 여럿 있는데 무슨 까닭 인지는 몰라도 그 산소의 자손들은 대를 잇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하여 어떤 지관(地官)이 건너편에 있는 호구암이 이 산소를 향하여 커다란 입을 벌리고 그 산소를 삼키려 하는 형국이라 자손이 드물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그 산소의 자손들은 성묘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그 호구암을 없앨 수 있나 궁리를 하였는데 그 호구암이 워낙 컸으므로 다른 곳으로 옮기기는 힘들었고 그 대신 산소를 향한 호구를 떼어 버리면 될 것이라 생각하여 그 범의 턱을 도끼로 때려 없앴다. 그 후부터는 자손들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 호구암은 약 50년 전에 염전을 만들 때 매몰되어 없어지고 말았는데 호구포 사람들은 그들의 수호신이 사라진 것을 서운해 하였지만 건너편 산의 산소 주인들은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논현동에는 소래산(蘇萊山) 바위가 저절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소래(蘇萊)는 원래 소래(蘇來)였는데, 그 유래는 신라가 백제를 침공할 때 지원군으로 온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왔던 곳이라는 뜻이다. 어느 날 소래산의 암석이 저절로 굴러 내리더니 골짜기에 굴러 내리던 여세로 다시 서봉(西峯)으로 굴러 올라 가 산 중턱에 멈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암석이 지나간 자리에는 큰 고랑이 패였으며 넓이가 두자 이상 되었다. 고을 사또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이 사실을 나라에 보고하였는데, 마침 이 사건이 발생한 그 해 12월에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소래산 암석의 이동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예고한 것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도림동에는 여무실(女舞室)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있다. 여무실은 도림동의 한 마을 이름인데, 옛날에 무당촌(巫當村)이었다고 한다. 여무실이란 여자가 춤을 추는 집이라는 뜻이다. 옛날에 이 마을에서는 큰집을 지어 놓고 처녀를 뽑아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 또는 무당을 양성하기도 했고, 따라서 무당이 굿하고 춤추는 집을 여무실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인천에는 ‘여(女)’자가 붙은 마을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여무실이고, 또 하나는 연희동(連喜洞)이다. 연희동은 원래 여신동(女娠洞)으로 신라시대 때 ‘여(女)’자와 ‘선(船)’자는 불길하고 천하다고 하여 ‘여’의 자(字)를 다른 글자로 고쳐 사용한 것이라 한다.
1988년 분구된 이래 남동구는 도시와 농촌이 병존하는 개발 잠재력이 풍부한 지역으로 전망되고 있다. 상공업 중심의 도심지역과 택지개발, 대단위 아파트단지 조성 등 쾌적한 신주거 환경을 형성함으로써 구세가 크게 신장되어 왔으며, 현재 시청, 교육청, 종합문화예술회관, 농수산물도매시장, 인천의 명물 소래포구, 각종 업무시설 등 행정, 문화, 금융, 경제의 주요기관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업의 메카인 남동공단은 9.57㎢의 부지에 4,399개 업체가 밀집되어 있다. 2008년 현재 토지 이용은 녹지 지역이 전체의 54%에 이르며, 주거 지역 27%, 공업 지역 14%, 상업 지역이 3%로 구성되어 있다.
남동구의 주요 교통망은 제2경인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외곽순환도로 및 도시전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의 북쪽은 경인선 철도 및 경인국도를 통해 인천의 서부 · 북부지역과 연결되며, 도로망은 구월동 및 간석동 일대의 중심상업지구와 남동공단지역 모두에서 대체로 규칙적인 패턴을 보여 새롭게 개발된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다. 중심업무지역에는 연수동 아파트단지 및 남동공단지역으로부터 부평 지역으로 이어지는 인천지하철 1호선이 건설되어 있다. 인천2호선 지하철이 통과하고 있다. 남동구를 통과하는 지하철 노선은 운연역과 인천시청역 사이 구간이다. 제2경인고속도로는 북쪽의 중심상업지구와 공업지구를 분할하면서 구의 중앙부를 동서로 통과하고, 서창동에서는 영동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지역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천시와의 경계를 따라서는 서울외곽순환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소래포구, 해양생태공원, 인천대공원 등이 있다.
소래포구는 수도권의 유명한 관광어촌의 하나이다. 소래포구가 생기게 된 유래는 1930년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이 지역의 천일염(天日鹽)을 수탈하기 위해서 수인선 철도를 건설하였고, 작업 인부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나룻배 1척을 최초로 소래포구에 두었다. 그 후 1960년대 초부터 이곳에 정착한 실향민이 어촌계를 구성하여 어업 활동을 하면서 소래포구는 어촌으로 발달하였고, 1980년대에 대단위 관광어촌으로 발전하게 되어 오늘날 하루 수 천 명에서 최대 3~5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지역이 되었다. 현재의 소래포구는 10톤 미만의 어선 234척이 연일 팔미도, 이작도, 풍도, 조치도, 용유도, 덕적도, 울도 등 서해의 특정 해역으로부터 일일 조업으로 연간 800톤, 금액으로 300억 원 가량의 어획고를 올리고 있으며, 기타 횟집, 어시장에서 올리는 총매출은1,000억 원대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해양생태공원은 갯골, 갯벌 지역과 대규모 갈대 군락지 등이 잘 형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식생물들이 공존하고 있다. 수생, 습생, 염생식물 등 식생 191종, 저서동물인 갯벌생물 11종, 어류 7종, 양서 · 파충류 5종,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 등 조류 71종, 육상곤충류 및 담수대형무척추 동물 273종이 서식한다.
인천대공원은 인천광역시 동부공원사업소에서 관리하는 11개 도시자연공원 중의 하나로 남동구 장수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모산과 상아산을 끼고 있다. 인천대공원은 인천 유일의 자연녹지 대단위 공원(89만평)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간석동은 원래 인천부 주안면 석바위와 새말 부락이라 불리던 곳이다. 1903년 인천부가 동리명을 확장할 때 석암리(石巖里), 간촌리(間村里)로 구분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간촌리, 새말, 벌터, 실은재, 석촌, 쇠파리, 풀무골, 삼거리, 기와집말을 병합하여 간촌과 석촌의 이름을 따서 간석리라 하였다. 광복 이후 간석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68년 구제실시와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시 남구 간석동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금호, 한진, 극동, 현대 등 대단위 아파트와 일반주택, 빌라 등 다양한 형태의 주거환경이 함께 혼재되어있는 주거지역이 되었다. 관내에 교육청, 대형 할인매장, 중앙공원, 문화예술회관 등이 위치한 행정, 교육, 문화 · 예술의 도심지역으로 전통과 현대가 함께 공존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구월동은 소래산 주안봉의 서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마치 거북이 모양과 같다고 하는 데에서 지명이 유래한다. 그리고 산이 활처럼 휘어져 반달 같다고 하여 구산(龜山)의 ‘구’자와 ‘월(月)’자를 따서 구월리가 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인천부 정지정이이라는 지명으로 있다가 광복 이후 구월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일대에는 큰구월, 작은구월, 전자울, 큰성말과 같은 자연촌락들이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관내에 인천광역시청이 소재해 있으며 그 외 다수의 공공기관, 금융업, 기업체 및 교육기관의 집중지로서 인천광역시의 경제 · 문화 · 행정의 요충지로서 자리 잡고 있다.
만수동은 과거 서울에서 만수포구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즉 중국의 무역선이 수산포구에 들어와 다양한 문물이 서울로 반입되는 길목이었으며, 이러한 지역성을 반영하여 주막거리인 김촌, 박촌, 하촌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만수동의 옛 이름은 새말, 구룡골, 신밀말, 담뱅이말, 장승배기, 비릭개, 돌골, 쇠판 등이라고 하였으며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만수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남동구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대단위 임대아파트를 조성해 서민 생활 및 복지를 추구하고 있으며, 주민 대다수가 아파트 및 연립주택에 거주하는 신주거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먹자골목을 중심으로 한 상가 기능과 동부교육청 및 남동등기소를 중심으로 한 교육, 행정 기능이 복합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장수동(長壽洞)은 백세까지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옛날에는 장자골말, 만이골말, 무넘이말 등 세 부락으로 이루어진 농촌지역이었다. 1914년 부천군 남동면 장수리였다가, 1940년 인천부로 편입되어 장수정이 되었으며, 1946년 동명 정정으로 장수동이 되었다. 서창동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선착장과 서창(西倉)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에서 지명이 유래하는데, 광복 이후 번창하는 동네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서창(西昌)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1977년에는 인접한 운연동과 통합하여 서창동이라는 이름을 유지하였다. 장수 · 서창동은 경기도와 접한 인천 내륙의 관문이며, 서울외곽순환도로, 제2경인고속도로 등이 교차 연결되는 교통중심 지역이다. 이곳은 인천대공원과 소래산 등 여가 공간이 있어 인천시민과 인근 타지역 주민이 즐겨 찾는 지역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도농복합의 전원도시 형태로 변모해 가고 있다.
남촌동은 문학산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남촌이라 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전반까지 이곳에는 상촌, 중촌, 하촌, 범말 등의 자연촌락이 분포하였으나 지금은 고층아파트인 풍림아파트(1·2·3차)와 500여 동의 빌라가 건축되어 도농복합 지역을 이루고 있다. 도림동은 예부터 복숭아밭이 많아 복숭아골이라고 불려온 데서 생긴 지명이다. 구한말에는 인천부 남촌면 도림리였으나 1913년 부천군 남동면이 되었고, 1946년 인천부에 다시 편입된 지역이다. 소래포구와 가까우며 오봉산 주위의 과수원이 많은 한적하고 순수한 농촌지역으로 지금은 복숭아보다는 배를 많이 작목하고 있으며 맛과 당도가 높은 남동배를 개발하여 전국에 공급하고 있다. 2003년에는 주공아파트 1,356세대가 입주하면서 인구가 급증했다. 또한 서해안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소래길, 남동로, 호구포로 등이 경유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지역 전체 면적의 85%이상을 그린벨트가 차지하고 있는 전원도시이다.
일제시대에는 부천군 남촌면 논현리와 고잔리로 불리던 지역이다. 1940년에 인천부 남동면 논현정(論峴町), 일향정(日向町)으로 개칭되었고, 1968년 구제 실시 이후 인천시 남구 논현동 및 고잔동으로 명명되었다. 오늘날 관내 면적의 50%를 차지하는 남동공단이 위치한 대단위 공업단지이며 전형적인 농 · 어촌과 도시형태의 다양한 주거환경이 어우러진 지역이다. 주변에 소래포구 어시장과 해양생태공원이 있는 문화 관광의 명소로도 알려지고 있으며, 논현 2택지 개발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신도시가 조성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