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천광역시) (())

인천광역시 서구청
인천광역시 서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인천광역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구.
정의
인천광역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계양구, 서쪽은 황해, 남쪽은 동구와 남구, 북쪽은 경기도 김포시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33′~126°43′, 북위 37°28′~37°38′에 위치한다. 면적은 114.00㎢이고, 인구는 50만 460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0개 행정동(20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인천광역시 서구 심곡동에 있다.

자연환경

지형적 특징을 살펴보면 동쪽에 계양산, 북망산, 천마산 등이 솟아 있어 그 동쪽의 계양구 및 부평구와 경계를 이루며, 공촌천, 시천천, 심곡천 등의 하천이 구의 동북쪽 계양산 줄기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면서 평야를 발달시키고 있다. 전체적으로 북고남저와 동고서저형의 완만한 사면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대부분 경사도 5% 미만의 완경사 지역이 서구 면적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구릉성 지형이다. 검단 지역은 해발고도가 높은 편이나 경사도 5% 미만이 74%로서 역시 구릉성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해안 지역의 경우 남북으로 향한 구릉성 산지가 해안에 가까이 접하고 있어 평야의 발달이 미약하고, 간석지나 갯골과 연결되는 하구에는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를 조성하였다. 그리하여 해안 간척에 의한 땅이 서구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구의 동쪽에는 남북방향으로 달리는 산지가 있고, 이 산지는 해안선에 이르러 크고 작은 만입을 이루고 있다. 이들 만입에는 방조제가 축조되어 염전이나 농경지로 개발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인근해의 사도(蛇島), 청라도(靑羅島), 율도(栗島), 장도(獐島) 등의 섬과 연계되어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됨으로써 토지가 크게 증가하였다. 새롭게 간척이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토지개발이 진행되고 있지 않으나, 신공항고속도로와 신공항철도, 경인운하 건설 등의 개발이 추진되면서 가까운 미래에 경관이 크게 변모할 전망이다.

주요 산으로는 계양구와의 경계 지점에 계양산(395m)과 천마산(226m), 김포시와의 경계지점에 가현산(215m)이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시천동의 시천천, 심곡동의 심곡천, 마전동의 나진포천, 금곡동의 검단천과 대포천, 대곡동의 대곡천이 있다. 또한 소하천으로는 금곡동의 용천과 금곡천, 불로동의 갈산천, 완정천, 목지천, 마전동의 가현천, 원당동의 매천, 당하동의 신기천, 대곡동의 황곡천, 백성동의 오랑천, 검암동의 상동천, 오류동의 대촌천 등이 있다.

연평균 기온은 11.5℃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163㎜이다.

역사

서구 원당동과 불로동 등 인천 내륙지역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구석기 시대의 고토양층과 구석기 유물이 확인됐다. 또 인근의 수원시, 평택시에서 구석기시대의 타제 석기가 몇 점씩 발견되고 강화도의 구석기문화가 확인됨으로써 인천 및 서구 지역에서도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서구 지역이 주부토군(부평의 고구려 지명)의 일부와 검포현(김포의 고구려 지명)의 일부였다.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 통일신라는 강역을 9주, 5소경, 121군, 290현으로 편제하였는데, 주부토군은 장제군, 검포현은 김포현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방리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군·현의 이름만 있으므로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장제군이 수주, 1150년(의종 4)에 안남도호부, 1215년(고종 2)에는 계양도호부, 1308년(충렬왕 34)에는 길주목, 그리고 1310년(충선왕 2)에는 부평부로 각각 개편되었다. 한편 그 사이에 김포현은 줄곧 김포현으로 유지되었으나 두 고을 모두 방리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부평부는 1413년(태종 13)에 부평도호부, 1438년(세종 20)에 부평현, 1446년(세종 28년)에는 다시 부평도호부로 복귀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부평현, 1506년(중종 1)에 부평도호부, 1698년(숙종 24)에 부평현, 1707년(숙종 33)에 도호부로 복귀되었다. 그 후 1760년(영조 36)에 만든 『여지도서』 부평부 편에 방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서구 지역에 해당하는 면은 석곶면과 모월곶면인 것으로 확인되지만 리의 명칭에 대한 기록은 없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위의 지역에 대한 방리가 기록되어 있다. 석곶면에는 봉현리, 가정리, 신현리, 포촌리, 번작리, 가좌리, 율도 그리고 모월곶면에는 공촌리, 연희리, 고잔리, 검암리, 시천리, 백석리, 청라도, 난지도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4월 1일 인천부는 부평출장소와 남동출장소 그리고 서곶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 중에서 지금의 서구에 들어든 서곶출장소는 당시 지명으로 정상정(井上井), 즉 연희동 지역에 설치되었다. 서곶출장소는 천간정(淺間町, 지금의 가좌동 지역), 운연정(雲宴町, 지금의 운연동 지역) 등을 포함한 12개의 정[町, 지금의 동(洞)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을 관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이 공포되고 8월 15일부로 시행되었는데, 이에 따라 인천부는 인천시로 개칭되었다. 인천시는 1956년 11월 23일 인천시 출장소 설치 조례를 개정하여 1957년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에 근거하여 본청의 직할 구역을 중부, 동부, 남부, 북부 등 4개의 출장소 관할 구역으로 분획하고 여기에 새로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9개의 출장소를 두게 되는데, 지금의 서구는 북부출장소에 포함되어 있었다.

1968년 1월 1일부터 인천시는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구제(區制)를 시행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중구, 동구, 남구, 북구 등 네 개의 구청을 신설하였고, 이때 종래의 9개 출장소는 폐지되었다. 다만 행정상의 공백을 예방하기 위하여 남구 관할의 남동출장소와 북구 관할의 서곶출장소 만을 새롭게 구획하여 설치·운영하였다.

그 후 인천시의 인구가 증가하고 급속한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시가지가 크게 성장하였고, 결국 1981년에는 인천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988년 1월 1일에는 오랫동안 존속되어 오던 북구의 서곶출장소와 남구의 남동출장소가 폐지되었다. 특히 북구의 경우 새롭게 서구가 분구되었다. 그리하여 북구 소속이던 백석, 시천, 검안, 경서, 연희, 공촌, 심곡, 가정, 신현, 석남, 원창, 가정동이 서구에 속하여 새로운 행정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1995년에는 인천직할시가 인천광역시로 개칭되면서 북구가 다시 부평구와 계양구로 분구되었고, 이에 따라 북구라는 지명은 인천광역시의 행정 체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김포군 검단면이 인천광역시 서구에 편입되어 서구 검단출장소가 병설되었다.

유물·유적

연희진지(連喜鎭祉)는 연희동 24번지에 있다. 연희진은 화도진과 함께 수도의 관문이며 해운상의 요충지인 인천 부평 연안이 개항지로 제시될 것에 대비하여 설치된 진이다. 연희진이 설치된 것은 인천이 개항되기 직전인 1879년(고종 16) 7월 1일이다.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가 진사와 포대를 축조하였는데 진의 이름을 각각 연희진과 화도진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연희진은 부평(현재는 서곶) 연안의 포대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화도진은 인천 연안의 포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런데 연희진은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고종 19) 6월 28일에 혁파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에 예속시켰는데, 연희진이 혁파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학계에서는 이때 연희진이 혁파됨으로서 연희진이 관할하던 부평 연안 포대들이 화도진 관할로 이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연희포대지는 연희동 서편 해안 용두산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용두포대라고 불리운다. 당초에는 인천 앞바다를 향하여 3좌의 포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포대는 없어졌고 축대만 남아 있다. 원래 부평 연안에는 연희포대(일명 용두포대) 외에 원창동에 2좌의 포대가 있었고 가좌동에도 1좌의 포대가 있었다고 하나 인천개항을 허용하기로 결정한 뒤인 1882년에 모두 혁파되었다.

중심성지는 계양구에서 서구로 넘어가는 경명현(景明峴, 징맹이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중심성은 경명현을 중심으로 동서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던 산성인데 현재는 완전히 없어지고 성문인 공해루가 서 있던 초석만이 남아 있다. 성벽을 쌓았던 돌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광복 후 미군들이 어떤 공사를 진행하기 위하여 모두 실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심성은 계양산 능선을 따라 일자성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문(경명문)에서 서쪽으로 약 20미터 아래에 ‘중심사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이 비에 의하면 중심성은 1883년(고종 20) 10월에 부평부사 박희방이 조정의 명령으로 주민들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는데 성문은 경명치라는 고개 이름을 따라 경명문이라 하고 문 위에 누각을 세워 공해루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성은 대중들의 마음, 즉 중심을 모아 축조하였다 하여 성의 이름을 중심성이라고 하였다. 중심성이 축조된 이 해는 바로 인천이 개항한 해로써 이는 병인양요(1866) 이후 외침의 방어를 일층 강화한 국방시책으로 서해안 방어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고개에는 문루를 세워 아래는 경명문이요, 문루는 공해루라 현액하고 부평 8경을 누상에 걸었다.

축곶봉수대지는 정동 축곶산 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부평부읍지』 봉수조에 “축곶산 봉수는 남쪽으로 인천부 성산 봉수에 응하는데 거리가 25리이고, 북쪽으로 김포 백석산 봉수에 응하는데 거리가 20리이다.”라고 되어 있다. 축곶봉수는 성산 봉수와 마찬가지로 순천에서 출발하는 제5봉으로서 이곳에서 검단 백석산, 통진 수안성산, 강화 진강산, 교동 화개산 봉수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강화 하음산, 강화 송악산, 통진 남산, 김포 북성산, 양천 화개산을 거쳐 서울 남산 제5봉으로 연결된다.

검단대곡동지석묘군(인천광역시 기념물, 1995년 지정)는 대곡동 산 123-1번지에 있다. 대곡동(일명 황골) 가현산에서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는 얕은 구릉 상에 위치하고 있는 이 지석묘는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다. 지석묘는 대체로 구릉의 진행 방향과 같은 동서를 장축으로 하고 있는데, 매몰되거나 주위에 흩어져 있어 대부분이 파괴된 상태이다. 판석을 사용해서 하부구조를 만든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와 연결 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서해안 지역과 한강 이북지역 지석묘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류사눌묘(인천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는 경서동 산 200-1번지의 금산에 있다. 이 묘역에는 문화류씨 일문의 묘 수기가 있는데 류사눌묘 앞에는 훨씬 후대에 설치한 상석, 문인석과 성구용이 찬한 묘비가 서 있다. 류사눌(1375~1440)의 자는 이행, 시호는 문숙으로 류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8세 때인 1393년(태조 2)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 등을 역임한다. 1407년(태종 7)에는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409년에는 사간원의 집의로서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태종비 원경황후의 동생들)을 탄핵하다가 황해도 안악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향리로 물러나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가 1416년에 지신사(도승지)로서 소합유를 진상하는데 잘못을 저질러 다시 안악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서 경상도 도관찰사가 된 후 함경도 도순문사, 강원도 도관찰사 등을 거쳐 1423년(세종 5)에는 한성부윤이 되었다. 그 후 1428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32년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조서강묘(인천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는 석남동 산 119-2번지의 경인 에너지 진입로 좌측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장방형 기대석으로 돌려 있으며 묘 앞에는 비와 문인석 한 쌍이 설치되어 있다. 『가선대부사조참판공지묘』라고 새겨진 비에는 연꽃을 엎어 놓은 것 같이 조각한 옥개석이 있고, 비 후면에 새겨진 글자는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마멸되었다. 이 조서강의 묘와 묘역에 설치되어 있는 석물 등은 조선 초기 분묘로서 그 완형을 유지하고 있는 인천지역 유일의 예로 알려져 있다. 조서강(?~1444)은 조선 개국공신 조반의 아들이다. 그는 1415년(태종 14)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1431년(세종 13)에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경상도 관찰사, 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고 도승지가 되어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다가 1444년에 이조참판을 역임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만년에 이조참판을 그만두고 부친 조반의 별업(별장)인 지금의 서구 가정동에 은거하였다. 그가 가정에 내려와 은거하자 세종은 궁중화가를 보내 가정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이후 많은 선비들이 가정을 주제로 시를 지었다고 한다.

한백륜묘역(인천광역시 기념물, 2004년 지정)는 마전동(능안 마을) 산 120-4번지에 있다. 한백륜은 예종의 비(妃)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아버지로서 청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9세에 관직에 출사하여 오위도총관 등 요직을 거쳐 1470년(성종 1)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묘역 안에는 당대의 문신(文臣) 김뉴(金紐)가 지은 신도비와 묘비 등이 있다.

숙의문씨묘는 심곡동 산 36번지 한국은행 연수원 입구 좌측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묘는 봉분이 퇴락하고 묘비조차 땅에 파묻혀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을 1947년에 류희진씨가 탐사 끝에 묘와 묘비를 찾아내어 봉분을 모으고 비를 다시 세운 것이다. 이때 백자에 쓴 문숙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숙의문씨묘는 그 후 1974년에 다시 묘역을 확장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숙의문씨(1426~1508)는 문종의 후궁이다. 묘지명에 의하면 문숙의는 남평의 망족이었던 남평문씨 문중에서 문민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조부는 세종조에 중추원사를 지낸 문효정이고, 증조부는 고려 공민왕 때 순평군으로 봉해진 문달한이다. 숙의문씨는 평생 인후를 마음의 근본으로 삼고 공검으로 몸을 다스리는데 힘썼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후사가 없었다.

인천 경서동 녹청자 요지(사적, 1970년 지정)가 서구 검암동 산438-21번지에 있다. 녹청자 발생에 대한 편년 문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고려시대 전기에서 조선시대 후기까지 서민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도요지의 구조와 양식을 보면 구릉을 타고 서남향으로 쌓아진 요상의 길이가 7.3m, 폭이 1.05m, 봉통(아궁이)의 폭이 1.2m의 드물게 보는 소규모의 요지이다. 1970년 6월 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이 고장으로서는 최초의 문화재였다. 인천시는 1984년 12월 9일 이곳에 보호막사 82.6㎡를 설치했다. 당시 발굴된 기종은 대접, 완접시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자배기, 반구장경병 항아리가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출토품의 모두가 문양이 없고, 유약을 긁어 장식을 시도한 흔적이 있어 눈길을 끈다.

가정지(佳亭址)는 조선 개국공신인 조반(趙胖, 1341~1401)의 별장 터로서 가정동 456번지에 있다. 『부평부읍지』 고적조에는 “가정이 서곶면에 있는데 복흥군 조반의 별업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반이 이 곳에 별장을 경영한 때는 1400년(정종 2)으로 추정되며 경영한 이유는 이곳이 외가(합천이씨)의 고장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반은 고려 말기인 공민왕 때 12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연경으로 들어가서 매부 인평장에 의탁하여 한문과 몽고어를 배우고 그 곳에서 벼슬을 하였다. 귀국하여 1382년(우왕 8)에는 판도판서로서 정조겸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서 왕의 시호 및 승습을 청하여 돌아왔으며, 1385년에는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복홍군에 봉해졌다. 1397년(태조 6)에는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다가 사동반도의 등주에게 제지를 받고 되돌아왔다. 이후 조반은 조선조에서 지중추원사, 판중추원사를 거쳐 삼찬문하부사로 있다가 1401년(태종 1)에 세상을 떠났다.

교육·문화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3개교, 중학교 22개교, 고등학교 16개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서구문화원이 가정동에 있고, 복지시설로는 검단복지회관이 마전동에 있으며, 교육시설로는 서구도서관이 가좌 3동에, 근로청소년복지회관이 가좌 4동에, 서구청소년수련실이 연희동에 각각 있다. 기타 체육시설로는 인천시립테니스장이 가좌동에, 인천 시립 연희승마장이 연희동에 위치한다.

민속

연희동의 당제, 검암동의 산제, 경서동의 산신제 등과 관련된 풍속이 있었다. 연희동의 당제는 매년 음력 10월 초에 날을 잡아 도당굿을 거행해 왔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는 경서동의 무속인들을 불러 큰 굿판을 벌였으나 그 뒤 간단한 제사로 이어오다가 1990년대에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거의 자취가 사라졌고, 이제는 간단한 고사로 명맥만을 잇고 있다.

검암동의 경우에는 도당굿을 하지 않고 산제를 지내왔다. 이 산제는 도당굿처럼 추수에 감사하며 마을의 평안을 부르고 액운을 막기 위해 당나무에 제사를 지낸다. 약 400년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고 하며, 도당굿으로 전승되다가 일제가 미신타파를 명분으로 탄압하자 산제로 변형시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당굿처럼 격년으로 시행하였다고 하며, 제사를 올리는 시기는 음력 10월 초순이었다. 9월 그믐 경에 마을 원로들이 모여 택일하였으며 부정한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결코 삼사일 이상 여유를 두지 않았다. 제사가 끝나면 제수와 음복물을 동네 사람들이 나눠 마시고 먹었다고 한다.

경서동은 해마다 봄, 가을에 동제를 지내는 전통을 이어 왔다. 봄에는 간략한 제사를 지냈지만 가을에는 도당굿을 펼쳤다. 1970년대에 들어 도당굿이 마을의 사정으로 인해 간헐적으로 생략되다가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도당굿의 명맥이 끊기고 산제로 대신하게 되었다. 청라도에서는 도당굿을 지냈으나 바다가 매립되어 섬이 육지가 된 뒤 중단되었다. 경서동 산신제의 절차와 내용은 검암동의 산제와 비슷하다.

설화·민요

철마산의 탁옥봉(琢玉峯)에 관한 전설, 가좌동의 명당에 관한 이야기, 원적사의 부처무덤과 말무덤에 관한 설화가 전해온다.

탁옥봉은 심곡동의 앞산인데, 천마산의 한 줄기가 뻗어 내린 것이다. 산기슭에 조선 문종의 후궁인 숙의문씨의 묘가 있다. 신라시대에 이 봉우리 밑에 어떤 도인이 정자를 세우고 춘하추동 수도에만 열중하였다. 도무지 먹고 마시는 것조차 안하는 것이 궁금해 사람들이 철야로 도인을 지켜보니, 도인이 밤에 솔잎을 따서 먹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도인을 존경하게 되고, 그 봉우리를 탁옥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여진을 정벌한 명장 윤관(尹瓘)과 관련한 전설도 있다. 그가 부평의 옛 이름인 수주의 목사로 부임했을 때, 어떤 도인이 석곶에 가면 명당 터가 있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윤관이 둘러보니 참으로 훌륭한 풍수를 가진 곳이었다. 소래산맥이 30리를 힘차게 뻗어 내렸고 계양산의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내려 마치 두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또한 천마산은 천 년 된 학이 내려앉은 모습으로, 안산이 수려하게 아름답고 그 아래는 섬이 있어 금학이 알을 품은 듯한 형상이었다. 윤관은 그를 수행한 풍수가로부터 설명을 듣고 크게 만족했다. 풍수가는 윤관에게 이곳에 달걀을 묻으면 사흘 안에 병아리가 저절로 부화되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윤관은 자신과 동행한 자신의 수하 이씨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이씨는 그 명당이 탐이 났으므로 삶은 달걀을 묻었다. 병아리는 나오지 않았고 윤관은 실망한 채 그 땅을 포기했다. 그 뒤 윤관의 수하였던 이씨가 그곳에 자기 부모의 묘를 썼고, 그의 가문이 융성하였다고 한다.

원적사의 부처 무덤과 말 무덤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석남동과 부평구 산곡동 사이에 있는 산이 원적산(元積山)이다. 이 산에 원적사가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 문을 닫았다는 사찰로 전해온다. 빈대는 불공을 드리러 온 신도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성을 부렸으나 살생을 금하는 불가의 규칙 때문에 손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스님들이 절 문을 닫고 말에 불상과 기물들을 실어 하산하던 중 말이 실족하여 죽자, 스님들은 불상과 기물들을 말과 함께 그 자리에 묻었다. 그래서 말 무덤, 부처 무덤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다른 스님들이 불상을 얻기 위해 그 자리를 파보았으나 불상도 기물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산업·교통

대체로 구의 남쪽, 경인고속도로 가좌 인터체인지 부근의 가좌동, 석남동, 신현동, 가정동 일대에는 전자·기계·제재·가구제조·식료품 등의 공장이 밀집해 있으며, 부근에는 1960년대 개발 초기부터 택지와 상가가 개발되었다. 율도 지역에는 석유·화학공업이 발달했으며, 간척지 북쪽의 경서동에는 경인주물공단이 조성되어 그와 관련된 공장들이 집적되어 있다. 반면에 구의 북쪽, 김포와의 경계지역인 검암·시천동 일대는 여전히 농업적 경관이 그대로 남아 있어 농업적 토지이용이 주류를 이루어지고 있다.

구의 중부에 해당하는 심곡동, 연희동 일대에는 3개 지구 총 134만㎢ 규모에 달하는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아울러 서구 행정의 중심 기관들이 입지해 서구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토지이용은 임야가 29.5%, 농경지가 34.1%, 대지 및 공업용지가 10.4%, 교통용지가 5.9% 등을 차지해 임야와 경지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편이다.

경인고속도로가 동쪽 산지 지역의 하단부를 따라 남북으로 달리며, 가좌 나들목, 서인천 나들목을 통해 서구와 연결된다. 최근에 확장 및 직선화 작업이 완료된 305번 지방도는 남북으로 달려 인천시와 김포시를 서로 연결한다. 동아매립지 위에 건설된 8차선의 남북간 연결도로도 인천 북항과 김포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계속 증가하는 인천 내항의 화물량을 분담시키고자 개발되어 있는 북항은 가까운 미래에 이 지역의 변화에 커다란 요소가 될 것이다.

남북 간의 도로망에 비해 동서 간의 도로망은 계양산, 철마산 등의 산지로 인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 중 서울올림픽도로와 서해안 쓰레기매립지를 연결하는 일명 쓰레기 매립도로는 서구 및 계양구 북부 지역의 지역 변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2000년 신공항고속도로가 개통하였고, 신공항고속철도가 운행 중에 있다. 인천2호선 지하철이 통과하고 있다. 서구를 통과하는 지하철 구간은 검단사거리역과 주안역 사이 노선이다. 또한 한강 하류 행주대교~인천광역시 서구 검암동과 시천동을 연결하는 운하인 경인 아라뱃길이 2012년 개통하였다.

관광

대표적인 관광 자원으로는 연희진지 및 포대지, 중심성지, 녹청차도요지 사료관, 민속생활용품전시관 등이 있다.

연희진지 및 포대지는 1879년 수도의 관문이며 해운 요충인 인천 부평 연안이 개항지로 제시될 것에 대비하여 설치된 진 유적이다. 중심성지는 병인양요(1866) 이후 관민이 합동으로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한 산성지이다. 경명문루 서쪽 옆에 중심성 사적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인천시는 이를 영구 보전하기 위하여 시립박물관에 옮겨 놓았었다. 이 사적비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9·28서울수복 때 함포사격에 명중되어 부서지고 비대석만이 남아 있다. 녹청자도요지 사료관은 원창동 93-5번지(청소년 수련관 2층)에 있다. 이곳에는 도리깨, 쟁기, 돌도끼, 토기, 항아리, 옛 등잔 등 118종 174점이 전시되어 있다. 민속생활용품전시관은 심곡동 244번지 서구청내 별관동 1층에 있다. 이 전시관에서는 선조들의 얼이 담겨있는 118종 232점의 생활용품들을 모아 보존하고 있으며 후세대에게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제공되는 등 인천의 역사와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동(洞)
  1. 검암경서동(黔岩景西洞)

검암동은 검은 바위를 뜻하는데, 현 서인천고등학교 담장 옆에 둘레 20여 미터의 검은 바위가 있었다는 유래에서 기원하는 지명이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부천군 서곶면 검암리였으며 광복 이후 검암동으로 개칭되었다. 검암동 지역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예로부터 검암, 간개발, 시내, 점말 등의 소규모 촌락이 산재해 있었다. 한편 경서동의 ‘경서’란 경명현(징쟁이 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은 원래 부평군 석곶면 고잔리였으나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어 이가정으로 불리었으며 1946년에 경서동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서해안 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염전이 많았으며 청라도, 난지도, 소문점도, 사도 등 여러 섬이 속해 있었다. 그러나 1986년 이후 요도와 이도, 묘도를 연결하는 대간척사업이 완성됨으로써 약 천만 평의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이곳은 인천경제자유구역 청라지구를 포함하고 있으며 신흥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1. 연희동(連喜洞)

연희동이라는 지명은 신라시대에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모시는 여자들을 이곳에 데려와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는 데에 기원을 둔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부평군 석곶면 연희리였으며, 1940년에 인천부로 편입되었다. 1977년에는 연희동 인근의 공촌동와 심곡동을 통합하여 연희동이 되었다. 연희동 역시 농촌 지역이었으나, 현재 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었고 구청, 경찰서, 소방서, 공무원교육원, 우체국, 전화국 등 각종 관공서가 위치하고 있어 서구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1. 가정동(佳停洞)

가정동이란 조선시대 개국공신 부여군 조반이 농사를 지으면서 시를 짓던 별장인 가정 터가 있던 곳이란 뜻에서 생긴 지명이다. 구한말에는 부평군 석곶면 가정리였으며, 1914년 부천군 서곶면과 통합되었고, 1940년에는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광복 이후 가정동이 되었으며 윗말, 아랫말, 돌록골, 상아고개 등의 자연촌락이 산재하였다. 현재는 가정 1, 2, 3동의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농 복합지역으로서 서구의 교통 중심지에 입지하고 있다.

  1. 석남동(石南洞)

석남동은 원래 부평군 모월곶면 고잔리, 가정리, 신현리로 이루어져 있던 지역이다. 1940년에 인천부에 편입되었고, 1977년에 석남, 가정, 신현동 일부가 통합되어 석남동이 되었다. 석남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급격히 발전하여왔다. 오늘날에는 가정로를 중심으로 상권 지역과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고 석남 1, 2, 3동의 행정동으로 구성된다.

  1. 신현원창동(新峴元倉洞)

신현동은 ‘새고개’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구한말까지 부평군 모월곶면 신현리였으나, 1914년에 부천군 서곶면이 되었고, 1940년에는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광복 이후까지 새고개, 구석말, 양금말, 요골, 가운데말과 같은 자연촌락이 분포하였다. 원창동은 삼남 지방의 세곡을 서울로 수송하기 위하여 모아두는 전조창이 있던 곳이란 뜻에서 지명이 유래한다. 1914년 부평군 석곶면과 통합되어 부천군 서곶면이 되었다가, 1940년에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오늘날 신현원창동은 가정로, 율도로, 원창로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원창동 지역은 인천정유를 비롯한 공업 지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1. 가좌동(佳佐洞)

가좌동은 속칭 ‘개건너’라고도 불리웠으며 1914년 부평군 석곶면과 통합되어 부천군 서곶면에 속해 있었다. 그 후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었으며 광복과 더불어 가좌동이 되었다. 가마굴, 능안, 건지골, 살구지, 네집네 같은 자연촌락이 있으며, 현재 가좌 1, 2, 3, 4동의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 검단동(黔丹洞)

검단동은 당초 김포시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95년 3월 1일자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광역시 서구로 통합되었다. ‘검단’(黔丹)이란 ‘검고 붉다’는 뜻으로 이 일대의 개펄 색깔에서 유래된 지명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검단1·2·3·4·5동으로 분동되어 있으며 행정구역상 마전동(일부), 금곡동, 오류동, 왕길동의 4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인천 북부 외곽 지역으로 서울, 김포, 강화를 잇는 삼각축 선상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또한 각종 도시기반시설(인천시에서 주관하는 구획정리사업의 일환)이 진행 중인 지역이며, 동시에 2006년에 발표된 수도권 신도시 후보지의 하나로서 향후 급격한 도시 발전과 인구 유입이 예상되는 지역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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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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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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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지지(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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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의 이모저모』(인천광역시, 2005)
『인천의 산과 하천』(인천광역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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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사』(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2)
『계양사』(계양사연구및발간위원회, 2001)
『계양의 어제와 오늘』(계양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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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지방행정구역요람』(내무부,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지방행정지명사』(내무부, 1982)
『도서지』(내무부, 1973)
인천광역시 서구(www.seo.inche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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