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는 경기도 부천시, 서쪽으로는 서구, 남쪽으로는 남동구 및 경기도 시흥시, 북쪽으로는 계양구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41′∼126°46′, 북위 37°27′∼37°31′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32.00㎢, 인구는 55만 584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2개 행정동(9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에 위치해 있다.
서쪽이 원적산, 호봉산, 남쪽은 만월산, 철마산 등으로 막혀 있고, 그 산지에서 발원한 굴포천, 청천천 등이 동쪽으로 흐르며 평야지대를 이룬다. 과거 벼농사로 이름 높았던 부평평야는 현재 공장 지역과 시가지 및 주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부평분지의 남쪽을 차지하고 있으며 구의 서쪽은 부평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지 능선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크고 작은 하천들은 부평분지 동쪽의 굴포천으로 모인다. 대부분의 하천은 산과 산이 만나는 고개 주변의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분지의 내부로 흐르면서 경사가 완만해지다가 부평분지의 동쪽 끝인 삼산동 목수통에 이르면 마치 우산살이 모여 들듯 한 데 모이며, 서쪽 산지에서는 동으로, 남쪽 산지에서는 북으로 각각 흐르다가 굴포천에 모여 넓은 유역평야를 형성한다.
주요 하천으로는 굴포천, 청천천이 있고, 산곡동과 서구 석남동 사이에는 천마산, 공원묘지와 남동구 간석동 사이에는 만월산이 위치해 있으며, 산곡동과 서구 석남동 사이에는 원적산이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9℃, 연평균 강수량은 1307.5㎜이다.(2008년 현재)
부평 지역에 관한 현존하는 옛 문헌이나 기록이 거의 없고, 아직 고고학적 발굴 작업이나 면밀한 지표조사가 충분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1950년대에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화강석의 돌도끼[石釜] 3점이 발견되었고, 인근 인천 지역에서도 돌도끼 10여 점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부족장급 무덤이라 볼 수 있는 고인돌 여러 기(基)가 발견되었다. 이 같은 유물과 유적의 발견으로 미루어 부평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이 청동기문화를 남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부평 지역은 삼국의 각축이 진행되는 동안 그 성쇠에 따라 귀속을 달리하였다. 특히 부평은 한반도의 중심부를 흐르는 한강에 인접해 있어 삼국 간 한강 유역 쟁탈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즉 백제가 한강유역을 지배하고 있을 때(초기부터 근초고왕 이후)에는 백제에 귀속되었고,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있을 때(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에는 고구려에,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있을 때(진흥왕대 이후)에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서기 940년(태조 23)에 지방제도를 갖추어 각 주부군현(州府郡縣)의 명호(名號)를 개정하면서, 신라 때 부평군을 지칭하던 ‘장제군(長堤郡)’이라는 지명을 ‘수주(樹州)’로 고쳤다. 그 후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鍊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이를 혁파하였다.
1150년(의종 4) ‘수주’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승격되었는데, ‘안남(安南)’은 ‘계양산(桂陽山)’의 다른 이름인 ‘안남산’에서 따온 것으로, 이때부터 한동안 부평의 지명이 ‘안남’으로 불려졌다. 1215년(고종 2) ‘안남도호부’는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개칭되었는데, 계양은 계양산의 이름을 딴 것이라 볼 수 있다. 1308년(충렬왕 34)에는 ‘계양도호부’가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2년 뒤인 1310년(충선왕 2) 여러 목(牧)이 폐지될 때함께 강등되어 ‘부평부(富平府)’가 되었다. 이때부터 ‘부평’이라는 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금주(衿州: 시흥군), 동성(童城: 김포군), 통진(通津: 김포군), 공암(孔巖: 김포군), 김포(金浦: 김포군), 수안(守安: 김포군) 등 여섯 현(縣)이 속현으로 소속되었다.
조선 태종 때 8도제가 실시되면서 1413년(태종 13) 부평도호부가 되었고, 세종 때 일시적으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8년 뒤 다시 도호부로 회복되었다. 세조 때에는 군제(軍制) 개편으로 부평도호부에 중익진이 설치되어 부사(府使)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나, 실효성 부족으로 2년 만에 폐지되었고, 그 후 진관(鎭管) 체제 하에서 수원진(水原鎭)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존엄과 관련된 사건으로 인하여 지방 행정기구의 변천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부평도호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1438년(세종 20) 부평 주민들이 온천을 은폐하였다고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8년 뒤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고, 1505년(연산군 11)과 1698년(숙종 24) 등 세 번에 걸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도호부로 복구되는 곡절을 겪었다.
1883년 인천 개항으로 인천 지역사회가 급격히 변모하는 가운데,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지방제도가 재편되었다. 이 때 인천의 행정과 사법 업무를 관장하던 인천감리서가 폐지되었으며, 부평도호부 역시 폐지되어 부평군이 되었다. 부평군은 인천부 소속 12군 중의 하나가 되어 인천부의 지휘감독을 받게 되었다. 1896년에는 지방제도가 재개정되었는데, 이 때에 인천부는 인천군이 되었고, 부평군과 함께 경기도에 소속된 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공포된 1913년의 부령 제11호에 따라, 인천부의 관할 구역은 개항장으로 축소되었고, 나머지 구역은 신설된 부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신설된 부천군은 기존의 부평군 전체와 인천군의 일부, 강화군의 일부 도서, 그리고 남양군의 대부면, 영흥면 등을 포함하는 대규모 영역이었으며, 부천이라는 지명도 부평의 ‘부(富)’와 인천의 ‘천(川)’을 조합한 명칭이었다.
이로써 부평군은 새롭게 설치된 부천군의 등장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이 때 부평군 관내 각 면(面)의 통폐합이 있었는데, 군내면, 서면, 마장면, 동소정면은 부내면으로, 석곶면과 모월곶면은 서곶면으로, 동면, 당산면, 황어면은 계양면으로, 석천면, 옥산면, 수탄면은 계남면으로, 그리고 상어정면, 하오정면, 주화곶면은 오정면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인천부는 일제에 의해 지리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두 차례에 걸친 부역(府域) 확장을 이루었다. 특히 제2차 부역확장 때 편입된 부내면과 서곶면은 옛 부평군 관할 지역으로서 현재의 부평구를 포함하였다. 그리고 부평구에는 인천부 산하 부평출창소가 설치되었다.
특히 일제가 조선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가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부평 지역에는 대규모 공업지대가 조성되었다. 이 지역에 공업지대가 조성된 배경은 북부 지역의 풍부한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는 점, 인력 자원이 풍족했다는 점, 육상 교통의 요지에 있었다는 점 등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부평에 입지한 것이 육군 조병창이다. 육군 조병창에서는 인천 지역 중화학 기계 공장의 지원으로 주로 소총, 탄약, 소구경 포탄, 총검, 수류탄, 경차량 등을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일제 말기에 조병창은 부평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1967년 인천시는 시 기구의 확대와 시 구역의 확장 그리고 도시계획 등의 발전적 확대과정을 거치면서 ‘구제(區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1968년 1월 1일자로 시행된 ‘인천시구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인천시 관내의 모든 출장소가 폐지되고 중구, 남구, 동구, 북구 등 4개 구가 신설되었다. 이때 부평 지역은 인천시 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7년에 이르면 인천은 서해안 시대의 주역을 자처하며 국제항으로 발전하였다. 이때 북구는 대통령령으로 북구와 서구로 분구되었다. 이 조치에 따라 북구의 관할 구역은 1출장소, 29개 법정동에서 옛 부평출장소 지역이었던 19개 법정동만을 관할하도록 축소되었다. 1989년에는 옛 부평 지역이었던 경기도 김포군 계양면이 북구로 편입되었으며, 구조례(區條例)에 따라 계양동이 설치되어 부평지역은 재차 확장되었다.
1988년에는 북구 조례에 따라 계양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그 이후 계양 출장소를 중심으로 관할 동이 증설되어 1992년까지 모두 29개 행정동과 32개 법정동을 갖추게 되었다.
1995년에는 법률 제4789호에 의거 인천직할시가 강화군과 옹진군을 포함하고, 인천광역시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1일 인천광역시 북구는 경인고속도로를 기준으로 그 남쪽의 부평구와 북쪽의 계양구로 행정구역이 분할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부평 지역의 유물, 유적은 주로 과거의 중심지였던 계양구를 중심으로 남아 있어 현재의 부평구 지역에서는 역사 유적이나 유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의 부평구는 원래의 부평 중심지가 아니며 일제강점기 이후 공장 지대와 시가지가 조성되면서 새로운 중심지로 등장한 신부평이다. 따라서 역사적 유물과 유적이 희소한 대신 부평 지역의 급속한 근대화를 보여주는 근대 학교 유적과 개신교 유적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부평 지역의 근대 학교로는 인천대정공립국민학교, 인천소화동공립국민학교, 인천소화서공립국민학교, 인천소화고등여학교가 있다. 기타 개신교 유적으로는 1947년에 설립된 부평중앙교회와 1949년 설립된 부광교회가 있다.
인천대정공립국민학교는 지금의 인천부평초등학교의 전신으로, 1899년 3월 15일 부평향교에서 부평소학교로 개교하였다. 1909년에는 부평보통학교로 개편되었고, 1911년 사립 계창학교를 병합하였으며, 1912년에는 부평공립보통학교로 개명되었다. 그 후 1934년 4월 1일에는 대정리(지금의 부평역 부근)에 부설 간이학교(지금의 부평동국민학교의 전신임)를 설치하였다. 1938년에는 부평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0년 부평 지역의 일부가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학교의 위치가 인천부 관할 지역이 되어 인천대정심상소학교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1941년에는 「국민학교령」에 따라 인천대정공립국민학교로 개명되어 광복을 맞았다.
인천소화동공립국민학교는 현재의 부평동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934년 4월 부평공립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로 출발하여 1940년 인천소화동공립심상소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41년 인천소화동공립국민학교로 개명되어 광복을 맞았다. 인천소화서공립국민학교는 부평 지역의 일본인 자녀 교육을 위해 1941년 3월 31일 설립되었다. 광복 이후 이 학교는 인천부평서초등학교로 개교하였다. 한편 인천소화고등여학교는 지금의 인천박문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40년 설립·인가되어 인천송림공립심상소학교의 교사를 빌어 개교하였다. 그 후 1941년 11월 7일 부평동 15번지(지금의 경찰종합학교)에 교사를 신축하였다. 1945년 4월 1일에는 교사가 일본 육군에 징발되어 항동 9번지로 이전하여 광복을 맞았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는 42개교, 중학교 21개교, 고등학교 19개교가 있다. 특수학교로는 성동학교, 예림학교, 은광학교, 혜광학교가 있다. 대학으로는 구산동 산47번지에 한국폴이텍2대학 인천캠퍼스가 있다. 이 대학은 직업능력개발 훈련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1968년 중앙직업훈련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1992년에는 다시 인천기능대학으로 교명을 개칭하고 산업학사 학위과정으로 개편하였으며, 2006년 3월 한국폴리텍2대학으로 개칭하였다.
부평문화원은 부평4동에 있으며, 복지시설로는 부평종합사회복지관이 사곡3동에, 갈산종합사회복지관이 갈산2동에, 삼산종합사회복지관이 삼산동에 있다. 도서관으로는 북구도서관이 부평4동에, 부평도서관이 십정동에 있다.
이 밖에 부평역사박물관이 부평의 역사와 문화를 재정립하고 지역 정체성 확립과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에 기여하고자 2007년 3월 삼산동 제1택지개발지구 제2호 근린공원 내에 개관하였다. 또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2009년 백운공원 인근(십정동186-411번지 일원)에 대공연장, 소공연장, 전시실, 회의실 등을 갖춘 부평아트센터가 건립되어 구민의 여가와 문화 활동장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봉산탈춤과 강령탈춤은 부평 지역의 대표적인 민속으로 남아 있다. 봉산탈춤은 200여 년 전부터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전승되던 탈춤이다. 그러나 1915년경 봉산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이전하고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탈춤도 사리원으로 옮겨져 경암산 기슭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전수되었다.
봉산탈춤은 세시 풍속의 하나로 매년 5월 단오 때마다 경암산 앞 경암 광장에서 밤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탈춤을 추며 밤을 지새웠던 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풍습이다. 이 탈춤은 황해도 전역에 분포한 해서탈춤의 대표 격으로 그 극본의 과장과 내용으로 보아 산도대감 계통극의 한 분파로 해석되고 있다.
봉산탈춤의 중흥자는 약 200여 년 전 봉산군의 아전이었던 안초목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전라도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 황토로 빚은 탈을 종이 탈로 바꾸는 등 이 놀이를 변화시켰다. 남쪽으로 중부지방의 신대놀이 지역과 연결되어 다른 지방 탈놀이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가며 개량되어온 것으로 믿어지는 봉산탈춤은 벽사(辟邪: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 신앙적 성격이 강했으나 현재는 종교적 요소보다는 오락적 요소가 더 우세한 편이다.
강령탈춤은 황해도 일대에서 놀아오던 두 유형의 탈놀이 가운데 하나이다. 황해도 지방에는 내륙의 평야지대인 황주, 서흥, 봉산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봉산탈춤과 해주, 옹진, 강령 등 해안지대를 대표하는 강령탈춤이 전래되어 왔다. 황해도 탈춤 중 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놀아 오던 강령탈춤은 봉산탈춤과 마찬가지로 80∼90년 전인 20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지금은 몇몇 전수자를 중심으로 그 맥이 계승되고 있는 실정이다.
부평 지역에는 일신동의 항동 전설, 경인운하 건설과 관련된 고개 이름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항동(航洞)은 지금의 일신동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옛날 이 마을에는 신씨(申氏)와 서씨(徐氏)가 많이 살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항동이란 이 마을의 형태가 마치 배와 같아서 생긴 이름이다. 그러한 관계로 마을 중앙부에 우물을 파면 배의 바닥이 뚫어져 가라앉는 격이라 해서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 근대화와 함께 의식이 개화되어 마을에 우물을 못 파는 것을 미신이라 여기고 여기저기 우물을 파니 부녀자들이 멀리서 물을 길어오는 노역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초기 일본 군부에서 이 마을에 군사기지(평양군사보급창 분소)를 설치함에 따라 마을 주택들은 모두 철거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노인들은 철거된 원인이 항동 마을에 마구 우물을 파서 마을이 망하게 된 것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굴포천은 고려시대에 운하를 파서 인천-부평 간을 연결하고자 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실패하였고,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김안로(金安老)가 재차 시도하게 되었다. 이 후 세 차례에 걸친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부평과 인천을 연결하는 고개들에는 원통이 고개, 무넘이(물넘이) 고개, 안하지 고개 등의 지명이 남게 되었다. 원통이 고개란 운하 굴착에 실패한 것이 ‘원통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무너미 고개는 고개 너머로 ‘물을 넘긴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며, 안하지 고개는 운하를 뚫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공사를 ‘아니 하겠다’라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인천의 시가지 개발은 개항 이후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본격적인 개발 사업은 1937년부터 「조선 시가지 계획령」에 의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면서 추진되었다.
부평 지역의 시가지는 1941년에 소화지구(현재의 부평동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현재의 부평1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육군 조병창이 들어선 군수기지였다. 조선총독부는 조병창의 배후도시를 만들기 위하여 부평역 앞 일대에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이 조병창 기지에는 미군 부대가 들어서 부평의 경제에 호경기를 제공해 주었다. 오늘날에는 미군 기지가 대폭 축소되고 나머지 토지는 모두 불하되어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부평 지역의 산업은 경인고속국도 남쪽에 자리 잡은 수출 4공단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수출 4공단은 1969년 8월 19일부터 입주업체들이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공단은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병참 기지로 개발된 기반 위에서 경인 축선상의 유리한 입지 조건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어서 1973년 7월 1일에는 주안에 제5공단을, 1974년 11월 5일에는 주안에 제6공단을 건설하였다.
수출 4공단에서 빠뜨릴 수 없는 회사가 대우자동차 공장이다. 1962년 부평 수출 4공단 남쪽에는 새나라자동차 조립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일본의 닛산[日産] 자동차 회사가 공급하는 부품 조립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외환 사정의 악화로 중단되었다가, 1965년 9월 신진자동차회사가 인수하면서 일본의 도요타[豊田]자동차 회사와 기술 제휴를 맺고 부품을 수입하여 자동차를 조립생산하게 되었다. 그 후 1972년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끊고 미국 GM 회사와 합작 투자하여 GMK를 설립하였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이 회사는 대우실업에 인수되면서 새한자동차로 상호를 바꾸었고, 오늘날 대우자동차로 개칭되었다. 미국의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가 인수하면서 2003년 GM대우로 개칭되었다.
부평의 교통로를 언급함에 있어 전통 시대의 경인운하 굴착 시도를 빠뜨릴 수 없다. 경인운하는 일명 ‘굴포운하’라고도 하며, 조세선이 자주 난파되었던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손돌목을 피하기 위한 대안 교통로로 조선시대에 착수된 것이었다.
경인운하는 한강 쪽에서 굴착하기 시작하여 굴포천을 경유, 원통현(부평에서 남동구 간석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을 통과하여 인천 앞 바다에 이르는 것으로 계획되었었다. 그러나 『정조실록』 권47 정조 21년 8월 병인(丙寅) 조에는 “원통현까지 이르렀으나 개착에 실패하여 공사를 중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통현의 개착 실패에 대해서는 기술상의 어려움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고, 풍수지리설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볼 때 원통현을 착파한다는 것은 커다란 난관이었을 것임에 틀림없고, 또한 막대한 노역과 경비가 소요되는 공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원통현을 “만년 공호(拱護)해야 할 땅”이라 하면서 “어찌 인력으로 착파할 수 있겠느냐”라고 한 것은 풍수지리적인 관념에서 해석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굴포운하의 개통에 실패함으로써 손돌목이라는 조운의 난관은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새로이 제기된 방안이 전조창(轉漕倉)의 설치였다. 『부평부읍지』에는 “전조창이 서곶면 포리에 위치하는데 삼남의 전세와 대동미를 이 곳에 납입하였다가 서울 각사(各司)의 요미(料米)로 반급(頒給)하였다. 당시의 전운당상(轉運堂上)이 정병하(鄭秉夏)였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삼남의 조세선이 손돌목까지 이르지 않고 이곳 전조창에까지 와서 세곡을 하역한 후 다시 육로를 통해 한양까지 수송하기 위해 설치했던 창고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조창의 설치 연대나 폐지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오늘날 부평 지역의 주요 교통로는 경인전철, 인천지하철 1호선, 서울지하철 7호선, 경인고속국도,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등이다. 경인전철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한국 최초의 철도로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 33.2㎞로 개통된 이후, 1974년 8월 15일 수도권전철화계획의 일환으로 전철화되었다. 경인선은 인천의 공업 발전과 운송 체계에 있어 중추적 기능을 맡고 있다.
부평구 관내에는 부개역, 부평역, 백운역, 동암역을 두고 있다. 인천지하철 1호선은 1993년 7월 5일 착공되어 1999년 12월 7일 박촌역∼귤현역 구간인 24.6㎞가 개통되었다. 인천지하철 1호선은 인천교통공사에서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부평구 관내에는 부평삼거리역, 동수역, 부평역, 부평시장역, 부평구청역, 갈산역을 두고 있다.
서울지하철 7호선은 2000년 8월 1일 서울 장암역∼부천의 온수역 간 46.9㎞ 구간을 개통하였으며, 2012년 10월 온수역에서 부천을 거쳐 인천지하철 1호선의 환승역인 부평구청역을 잇는 10.2㎞ 구간을 연장하여 개통하였다. 부평구 관내에는 부평구청역, 굴포천역, 삼산체육관역이 있다.
한편 인천 남구 용현동에서 서울시 양천구 신월동에 이르는 경인고속도로는 길이 23.9㎞, 왕복 6∼8차선 고속도로로 서울과 인천 사이의 급증하는 수송 수요에 대비하여 1968년 12월 21일 준공 개통된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부평구 진입은 부평 IC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중동 IC에서 진입할 수 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경기도 일산∼퇴계원∼판교∼산을 원형으로 연결하는 길이 91.25㎞, 왕복 4∼8차선 도속도로이며,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등 신도시 건설에 따른 교통난 해소를 위해 건설되었다. 부평구 진입은 중동 IC와 구산동 IC등 2곳에서 진출입할 수 있다.
부평구 관내의 도로는 경인국도, 원통로, 천마로 등 3개 노선이 인접 지역과 연결되는 주요 간선이며, 남북 방향의 도로로는 계양구와 연결되는 부흥로, 부평로, 청천로, 백마로 등의 5개 노선이 있다. 이 외에 인천의 항만과 서울권을 연결하는 경인전철(동암, 백운, 간석, 부평역)이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고 있다.
한편 부평 지역에 조성된 지선 도로들은 대부분 간선 도로와 수직으로 교차하는 패턴으로 뻗어나가 있는데, 여기에는 신촌로, 공병로, 삼산로, 갈월로 등이 포함된다.
오늘날 부평구는 상업, 공업, 주택, 농촌 지역이 공존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수출 4공단의 공업지역과 구획정리된 주택지가 있으며, 변두리에는 농경지와 임야 지역이 아직 남아 있다. 주거 지역은 부평과 백마지구(산곡동, 청천동), 상업지역은 부평동과 부개동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공업지구는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갈산동, 청천동, 산곡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주요 관광 자원으로는 부평풍물대축제, 신년음악회, 문화의 거리 등이 있다. 부평풍물대축제는 예부터 인천 지역과 문화권을 달리하여 발전해 온 부평의 평야를 중심으로 형성된 농경문화를 상징한다. 이 행사는 매년 5월에 실시되며 부평공원을 비롯한 일대에서 전개된다. 개막축하 음악회를 시작으로 풍물콘서트, 문화행사 등 다양한 행사와 전통문화가 재현되며, 내용과 대규모 행사로 인천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부평신년음악회는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연초에 오케스트라 협연, 성악, 부평여성합창단 공연 등 음악회를 개최함으로써 구민화합의 자리 마련과 지역공동체 조성 등 ‘풍요로운 문화부평’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매년 1월 개최되고 있다.
이 외에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된 ‘문화의 거리’는 각종 공연과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특히 청소년의 정서순화와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약 8개월 동안 청소년 라이브 행사가 상시 공연되고 있다.
부평이라는 이름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부평부라고 불려진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부평 지역은 현재의 계양구 계산동이 그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 경인선 철도 개통과 함께 부평역이 생기면서 그 주변과 시장 지역을 부평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지역은 한말에는 부평구 동소정면 대정리로 불렸다가 1914년 부천군 부내면 대정리가 되었고, 1940년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소화정이라 불렸다. 광복과 더불어 1948년 부평동으로 개칭되었다. 부평동은 상업지역과 준주거지역이 혼재해 있으며 근린생활시설이 들어설 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으며, 부평 1∼6동으로 분동되어 있다.
산곡동은 본래 부평도호부 마장면(馬場面) 산곡리(山谷里) 지역이었다. 이곳은 산이 곶으로 되었다는 데에서 뫼꼬지, 뫼꽂말 또는 산화촌(山花村), 산곡(山谷) 이라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말을 먹이던 곳이 있었던 데에서 마장, 백마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장끝말을 병합하여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40년 4월 1일 인천부역 2차 확장 때 인천부에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하구바쬬[白馬町]라 하다가 1946년 4월 1일부터 동명 변경에 의하여 산곡동으로 개칭되었다.
현재도 일제강점기 조병창 사택지구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노후 주택이 다수 분포한다. 오늘날 원적산 산록대를 중심으로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고, 관내 면적의 2/3가 개발제한구역이다.
원적산과 마제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마을 앞을 흘러가고 있어 이 하천을 청천(淸川)이라 불렀고, 청천동이라는 지명은 청천 옆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유래를 갖고 있다. 과거 청천동은 마장뜰 벌판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마장면, 마장뜰, 마제이 등으로도 불리기도 하였다.
마장(馬場)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효성동, 청천동, 산곡동 그 일대에 말(馬)이 가장 좋아하는 억새풀이 우거져 있었던 데에서 기원하였다. 현재 청천동은 부평구, 서구, 계양구 구계 접속지역으로 청천공단을 관할하고 있다. 공단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수 있고 주거환경은 단독주택 빌라, 연립 등 비교적 영세한 편이다.
갈산이라는 지명은 지금의 부평정수장 자리에 있던 산에 칡이 우거져 있었다는 데에서 기원하는 이름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갈우(葛隅) 혹은 갈월(葛月)이라고도 불리었다.
이곳은 구한말까지 부평군 서면 갈월리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 부천군 부내면 갈월리로 개칭되었다. 그 후 1946년에는 경기도 인천시 갈산동으로 개명되었으며, 1968년 구제 실시에 따라 인천시 북구에 편입되었다. 1992년에는 삼산동과 분리되었고 1995년 이후 인천광역시 부평구 갈산동으로 존속해 오고 있다.
삼산동이란 이 지역이 영선산, 갈산, 금산 등 3개 산줄기 밑에 둘러싸인 분지모양의 지형이라는 이유로 생긴 지명이다. 구한말에는 부평군 서면 후정리라고 불리다가 1914년 부천군 부내면 후정리가 되었다.
1940년에는 인천부로 편입되어 삼입정이라 불려졌다가 1946년에 삼산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2006년 4월 10일에 삼산1동과 삼산2동으로 분동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일반녹지, 생산녹지, 준공업지역 등이 혼재된 도농 복합지역이다.
부개동이란 부평의 초입지로 부평이 시작되는 곳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이곳은 구한말 부평군 동서정면 마분리였으나, 1914년 부천군 부내면 마분리가 되었고 1940년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렸던 지역이다. 그 후 1946년에는 부개봉의 산 이름을 따서 부개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55년 일신동, 구산동을 통합하였다가 1982년에 일신동(구산동 포함), 1985년에 부개 2동, 1992년에 부개 3동으로 각각 분동되었다.
현재 경인 국도 및 전철 교통망이 통과하고 있으며, 주거환경이 대체로 열악한 단독 및 다세대 주택 밀집지역이다. 부개동 445번지 일원은 주거 환경 개선 지구로 사업이 추진 중에 있다.
일신동이라는 지명은 광복 이후 모든 것이 새로워진 동네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구한말에는 부평군 동소정면 항동이었으나, 1914년 부천군 부내면 항동리로 되었다가 1940년에 인천부로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1946년부터 일신동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동네가 배(舟)의 형국이란 뜻에서 항동 혹은 항굴이라고도 불렸다. 이에 따라 풍수지리적으로 동네 안에 우물을 파면 동네가 망한다는 전설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주둔지로 조성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일신동 지역의 대부분이 군 주둔지로 기능하고 있다. 최근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조성과 도시외곽순환도로의 건설 등으로 동네가 다시 일신되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십정동은 구한말 인천군 주안면 십정리 지역으로 우물이 열이 있으므로 열우물 또는 십정(十井), 십정리라 하였다. 또 일설에는 현 상정초등학교가 있는 위쪽에 큰 대동우물이 있어 물량이 많고 아무리 추워도 물이 따뜻한 열(熱)이 많이 나는 우물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 지역은 주로 일제강점기 시가지화 된 지역으로 현재 주거 환경 개선사업이 진행 중인 개발지역이다. 또한 십정재래시장과 거주지역, 수출 5·6산업공단의 일부, 그린벨트가 혼재된 복합 환경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