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책. 국한문·한글필사본. 이 작품은 작자의 문집인 『사애집(沙厓集)』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국한혼용본(國韓混用本)으로 작자의 종가에 전하는 종가본이 있는데, 가장 정제되어 있으며, 작자의 손녀가 암송 필사한 것으로 안규동(安圭東) 소장의 송곡본(松谷本, 한글본)이 있다. 그 밖의 이본은 이 두 본을 전사한 것인데, 하성래(河聲來) 소장본은 증손 민영목(閔泳穆)이 종가본을 전사한 것이다.
작자는 1854년 47세의 나이로 전주에 있는 조경묘(肇慶廟) 별검(別檢)에 제수되어, 전주로 내려가 빈 재실(齋室)을 지키며 무료히 나날은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듬해 봄에 현령 정의관(鄭義觀), 참봉 이봉현(李鳳賢), 진사 최현우(崔顯宇) 등 몇몇 벗들과 함께 완산의 승경인 한벽당(寒碧堂)·만경대(萬景臺)·옥류동(玉流洞) 등을 구경하고 돌아와, 1856년에 완산의 풍물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은 이 작품을 지었다.
또 한편 민주현은 천신만고 끝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자기가 품은 경륜을 펴보지도 못한 채 재실을 지키는 별검으로 밀려나자, 그 답답한 심정을 이 작품 속에 은연중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완산가」는 비록 현직 관원이 지은 것이기는 하나, 유배가사 또는 은일가사(隱逸歌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종가본과 송곡본을 비교할 때, 송곡본에는 남천(南川) 표모(漂母)의 풍물 2행이 첨가되어 있어 형식은 4음보 1행을 기준으로 모두 98행이며, 종가본은 이 부분이 빠져 있어 총 96행이다. 완산의 승경과 풍물, 별검생활의 외로움과 향수, 결사 등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단락에서는 먼저 북도 이남 제일강산인 완산의 기린봉(麒麟峰)·발봉(鉢峰)·이목대(梨木臺)·오목대(梧木臺)·완산칠봉(完山七峰)·건지산(乾止山)·곤지산(坤止山)·장군봉·투구봉 등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곳들에 대해 노래한다.
이어서 한나라의 발흥지인 풍패(豊沛)와 같이 조선조의 발흥지인 완산의 사적, 옥류동·한벽당을 거닐고, 만경대·공북루(拱北樓)·만화루(萬化樓)를 대상으로 지은 시들을 읊는다. 그리고 십리에 걸친 덕진지(德津池)의 연꽃과 남쪽 시냇가에 빨래하는 여인의 모습 등 완산의 풍물을 노래하였다.
제2단락에서는 주로 자신의 심회를 읊고 있다. 자신을 신선에 비겨 선인이 이 세상에 귀양살이 내려와 성인의 학문(유학)을 독실하게 공부한 뒤, 과거에 급제하고 고을에 이름을 울리었으나, 찬 재관으로 밀려와 외롭게 지내고 있음을 한탄한다.
“가소(可笑)롭다 나의 행적(行蹟)/가소롭다 부세공명(浮世功名)/남아(男兒)의 경제대업(經濟大業)/치군택민(致君澤民) 하렷든이/뜻과 같이 못할진대/부운부기(浮雲富貴) 경영(經營)하랴.”하며 관계(官界)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멀리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을 읊고 있다.
제3단락에서는 “나 일즉 산인(山人)으로 그 뜻이 간절(懇切)하나/명시(明時)를 마침 만나 참아 영결(永訣) 못하온이/기산영수(箕山潁水) 숨은 사람 이 내 종적(蹤跡) 웃지 마소/나도 언제야 소원(所願)을 약간 갑고/급류(急流)에 물러나 벽산(碧山)에 깃들일가 하노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한문 고사(故事)가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문학사적으로 볼 때 가사문학의 쇠퇴기에 나타난 귀족·양반가사로서 고아(古雅)하고 품격 높은 작품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