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 국왕은 일월신(日月神)에게 정초에 배례를 했으며, 팔월보름이면 달밤에 여성들이 길쌈을 끝내고 가무백희를 했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때 달을 즐기며 술을 벗삼아 완월장취(玩月長醉)하는 풍습이 전해졌다.
완월(玩月)의 완은 ‘완’(翫 : 가지고 놀 완)과 같은 뜻이며, 상월(賞月)로도 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예종 2년(1107) “중추절이므로 왕이 문신들을 이끌고 중광(重光)의 편전에서 완월하며 영월시(詠月詩)를 지었다”고 하였다.
조선 성종 20년(1489) 팔월보름에 국왕은 완월하면서 어서를 내리길 “옛사람의 달구경은 반드시 뜻이 있어 나무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본래 이 풍속이 없어서 비록 상례(常例)로 삼을 수 없으나 일시의 군은(軍恩)이고, 마침 가절(佳節)을 만났으니 무슨 방해됨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당시 완월 풍속은 널리 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종은 이듬해 추석완월연(秋夕翫月宴)을 상고하여 아뢰라고 전교(傳敎)하였으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유빈(柳濱)이 “옛사람으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좋은 날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달구경하며 회포를 푼 적은 있었지만 온 조정이 완월하며 희롱했겠습니까?”라며 완월연의 정지를 건의하자, 성종은 “하루의 즐거움 또한 무방하지 않겠냐”고 하고, 입직승지 및 도총관 · 여러 장군과 병조에 명하여 인정전(仁政殿) 아래서 완월하게 하였다.
중종 5년(1510) 팔월보름에 홍문관에 ‘옥당완월(玉堂玩月)’이란 어제로 칠언율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중국 청대의 ≪월령수편 月令粹編≫ 권13, 8월 15일조에는 이때의 절식(節食)으로 ‘완월갱(翫月羹)’을 만들어 먹고 천주봉완월(天柱峰翫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완월과 관련하여 토끼 똥을 완월사(玩月砂)라 하는데 눈병이나 폐로(肺癆 : 폐결핵) 등에 약으로 쓴다. ‘완월’의 명칭은 조선시대의 고소설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이나 신소설 「완월루(玩月樓)」 등에도 보인다.
민간에서는 추석 때 남보다 먼저 달마중을 하면 첫아들을 얻는다고 하며, 송편과 박고지, 토란국을 먹으며 달 속의 옥토끼와 계수나무 이야기를 나눈다. 문벌 있는 집안이나 계모임에서는 요즘도 완월하면서 시를 짓고 서로 강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