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5년(우왕 11) 2월 딸을 우왕에게 바쳤는데, 실은 1383년(우왕 9) 9월 그는 전 전공판서(前典工判書)로서 그의 딸을 변안열(邊安烈)의 아들 변현(邊顯)과 성혼시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왕의 강요에 의하여 납비(納妃)한 것이었다.
1387년(우왕 13) 8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오르고 1388년 1월 지문하사(知門下事)가 되었으며, 3월 딸은 선비(善妃)에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 있고 6월 우왕이 퇴위하자 다른 비부(妃父)들과 함께 유배되었다. 곧 사면되었으나 1391년(공양 3) 5월 공양왕 즉위년에 있었던 우왕 복위와 관련된 김저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