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언궁(龍堰宮)이라고도 한다. 고려 예종(睿宗) 연간에 서경(西京: 현, 평양직할시)에 건립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옛 터가 평양부(平壤府) 북쪽 4리에 있다고 전하며 을밀대(乙密臺) 남쪽, 일제강점기 평양박물관이 들어선 자리가 궁궐터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용덕궁(龍德宮)의 조성에 관한 논의가 예종 초에 처음 등장한다. 1106년(예종 1) 술사(術士)가 도참(圖讖)으로 서경 용언(龍堰)에 궁궐을 창건하여 순행(巡幸)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왕이 태사령(太史令) 음덕전(陰德全), 주부동정(主簿同正) 김위제(金謂磾) 등을 보내 용언의 옛터를 살피도록 하였고, 모두 좋다고 하였다. 다만 오연총(吳延寵)은 옛 궁을 버리고 신궐(新闕)을 짓는 것은 민력(民力)과 재력(財力)의 소모가 심하다고 반대하여 용덕궁 조영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궁궐의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여진정벌(女眞征伐)과 1109년(예종 4) 동북 구성(九城) 철거 등 혼란한 정세 탓에 용덕궁의 영건(營建)에 대한 논의는 한동안 재개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116년(예종 11) 4월 예종이 서경에 행차하여 태조의 진전(眞殿)에 참배하고 장락궁(長樂宮)·구제궁(九梯宮) 등을 거쳐 용덕궁에 이어(移御)한 것으로 보아 이즈음 궁궐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종은 용덕궁 전각인 건원전(乾元殿)에서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유신교서(維新敎書)를 반포하였다. 용덕궁의 전각 수나 규모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용덕궁의 영건은 표면상 기업(基業)의 연장을 목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전해지나, 실제로는 여진정벌을 뒷받침하는 조치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울러 거란(契丹)과의 전쟁 이후 퇴조하였던 고구려 계승의식(高句麗繼承意識)을 환기하고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영유 의지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위로 이해되고 있다. 용덕궁의 조성은 여진정벌, 금(金)나라의 등장, 거란의 쇠락 등 혼란했던 당시 국제 정세와 관련하여 고려의 정세 판단과 그에 따른 역사계승인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