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에 석양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 2쌍이 배열되어 있다.
이 중 상석 좌우의 문인석 1쌍은 높이 80㎝, 어깨 폭 40㎝로 작은 크기이며,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묘역 앞쪽의 문인석 1쌍은 금관조복 형태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것이다. 석양을 포함하여 장명등, 상석 등의 석물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유언으로 묘비는 세우지 않았으며, 신도비는 땅에 묻었다 한다. 1926년에 후손들이 신도비를 발굴하였으나,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새로운 신도비를 제작하여 옛 신도비와 함께 세웠다.
김자수는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공양왕 즉위 후 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던 숭불(崇佛)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1392년 고려왕조가 붕괴되고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