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高麗史)』 권39 공민왕 10년(1362)조와 『문헌비고(文獻備考)』에 그 지어진 경위와 한역가(漢譯歌)가 전한다.
공민왕 10년인 신축년 겨울에 홍건적(紅巾賊) 20여만명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와 서울을 함락하고 주둔한 지 수개월이 되었다.
소나 말 등의 가축을 죽여서 그 가죽을 펴 성(城)을 삼고 물을 대어 얼음을 만드니 사람이 붙잡고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또 우리 백성들을 잡아 불에 굽고 혹은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이를 삼는 등 잔인하고 포악한 행동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 때 왕은 남쪽으로 피난하여 안동에 이르렀다. 거기서 왕은 영호루(暎湖樓)에 행차하여 그곳 안렴사(按廉使)의 향연을 받으며 활쏘기와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수많은 백성들이 옷깃을 돌려 탄식하기도 하고 혹은 「남구요(南寇謠)」와 더불어 이 노래를 외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한역가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소는 크게 울고 용은 바다를 떠나니/얕은 물에서 맑은 물결을 희롱하네/옛적에 그 말을 들었더니/이제사 그 징험을 보겠네(牛大喉龍離海 淺水弄淸波 古聞其言 今見其驗).”
이 노래는 당시의 정치현실을 우의(寓意)와 상징을 써서 풍자한 것이다. 여기서 소가 크게 운다는 말은 20여만 명의 홍건적이 신축년, 즉 소[牛] 해에 침입해 들어와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였음을 뜻한다.
용이 바다를 떠난다는 말은 임금(공민왕)이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가버림을 뜻하며, 얕은 물에서 맑은 물결을 희롱한다는 말은 안동땅의 영호루라는 곳에서 뱃놀이를 즐김을 뜻한다.
이로써 볼 때 이 노래는 홍건적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서울은 적의 만행으로 유린되어 온나라가 도탄에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동으로 피난한 공민왕이 영호루에서 뱃놀이와 활쏘기나 즐기는 꼴을 목격하고 그곳 백성들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 노래한 정치적 민요이자 참요임을 알 수 있다. 『문헌비고』에는 동요라 하였으니, 참요의 예언적 성격을 강조하느라 그렇게 규정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