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욱(崔仁旭)이 지은 단편소설. 1939년 4월 ≪조광 朝光≫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후반 일제의 군국주의가 그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면서 지식인들이 사회현실에 등을 돌릴 무렵, 생명의 신비와 허무의식에 빠져들었던 문학의 경향을 대변해주는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서 섬세한 묘사와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돋보이지만, 자기 운명에 순응하는 소극적 인간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월숙’이라는 한 여인이 남겨둔 ‘월하취적도’라는 그림에 얽힌 이야기이다.
작중의 시점 인물은 정주(貞柱)라는 사람인데, 그는 신문사에 근무하던 문필가이다. 몸이 허약해져 운호사(雲湖寺)라는 절을 찾아가 정양을 하며 지내는 중에 우연히 같은 절간에 와서 몸을 쉬고 있는 한 여인을 알게 된다.
그녀가 바로 월숙이다. 월숙은 그림공부를 하였던 사람으로, 서울에서 전문학교를 나왔으나 폐병에 걸려 이곳 절간으로 휴양을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주는 이 여인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러나 월숙은 점점 병세가 나빠지게 되고, 자신이 남겨둔 그림 한폭을 정주에게 주게 된다. 그러고는 서리가 내려 절간의 모든 꽃들이 시들어버리던 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현실에서 절연된 상태에 놓여 있다. 일상적인 생활의 제도를 완전히 벗어난 두 사람의 행동과 사고가 절간을 배경으로 신비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퇴폐적이고도 비극적인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허무의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당대적 현실의 암울성을 전제할 경우, 이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는 삶의 방식이 도피적이며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시들어 떨어지는 이 조락의 계절에 세상을 떠나는 월숙의 삶의 과정을 자연의 신비에 대조시켜본다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의 삶을 상실해버린 상태에서 남는 것은 허무뿐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연못에 비친 달을 건져내고 싶다는 월숙의 희망은 자연에 대한 귀의나 동화를 뜻한다기보다는 생명의 소멸이라는 죽음의 그늘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 이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의미는 ‘상실감’이라는 말로 집약시킬 수 있다.
삶의 현실에서 요구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두 사람의 등장인물에게서 떠나버렸고, 결국은 자기 생명마저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실감에서 비롯되는 허무의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은 정주의 태도에서, 우리는 다시 삶과 절연된 상태에서 그려진 한폭의 ‘월하취적도’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