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증조는 우의정 유관(柳寬)이며, 아버지는 감찰 유환(柳睆)이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났으며, 약관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1490년(성종 21)에 내금위(內禁衛) 무관으로 있다가, 1493년에 문관·무관이 모인 자리에서 열린 활쏘기대회에서 장원하여 벼슬이 올라 종성통판(鍾城通判)이 되었다.
1496년(연산군 2)에 당상관이 되었고, 1509년(중종 4)에 좌포도대장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경상도우방어사가 되었다. 이 해에 삼포(三浦)의 왜인들이 난을 일으키자 황형(黃衡)과 함께 김해에서 급히 수군을 조발하여, 왜인들이 진장(鎭將)을 죽이고 점거하고 있던 웅천(熊川)·부산포(富山浦) 등을 탈환하고 그들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관찰사가 되었다. 1513년에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곧 병조판서가 되었고, 1518년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곧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평안도순변사를 겸임하였다.
그 때 북변 건주위(建州衛) 야인(野人)의 세력이 팽창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량과 병기를 정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1519년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이어서 좌참찬이 되었다.
그 뒤 병조판서와 지훈련원사를 거쳐서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37년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계비)의 희릉(禧陵)을 옮길 때 능 속에서 바위가 드러나, 지난날 장례에 참여한 관원들이 처벌됨에 따라 유담년도 직첩을 추탈당하였다.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