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 출신.
1943년에 강제수용되어 있던 일본 가와자키[川崎]의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서 훈련공에 대한 민족적 차별에 심한 분노를 느꼈다. 이에 조문기(趙文紀) 등과 주동해 1,000여 명의 한국인들이 3일간 파업 끝에 요코하마[橫濱] 헌병대와 가와자키경찰서 80여 명에게 포위되어 회사의 식당 내에서 항쟁하였다.
귀국한 뒤 조문기·강윤국(康潤國)·우동학(禹東學)·권준(權俊) 등과 함께 서울 관수동의 자기 집에서 비밀결사인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1945년 7월 24일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조선총독을 비롯한 조선군사령관,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 일당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박춘금의 주재로 열렸다. 이 때 박춘금은 새로이 친일폭력단인 대의당(大義黨)을 조직하고 친일관제 민중대회를 열어 일본에 적극 협조할 것을 역설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정원간(丁元幹)·정유분(鄭維芬), 만주에서 당춘전(唐春田), 일본에서 다카야마[高山虎雄] 등을 초청, 강연을 하였다.
즉, 동북아시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일제에의 충성을 맹세하고 우리 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민족이 무모한 전쟁의 제물이 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대한애국청년당 당원들은 회의장소인 부민관을 폭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자신이 수색의 변전소 이전작업장에서 입수한 다이너마이트로 사제 폭탄 두개를 만들어 대회 전날 자정이 지난 뒤 부민관 뒷담을 넘어 들어가 무대 뒤에서 변소로 통하는 길에 폭파장치를 해두었다.
7월 24일 대회가 개최되자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잠입하여 장치한 폭탄을 터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동료 중의 한 명이 폭파장치한 선을 잘못 건드려 먼저 폭발하고 말았다. 이 바람에 대회장은 수라장이 되고 선을 건드린 대원은 즉사하고 말았다.
이에 놀란 일본경찰이 정문을 봉쇄, 색출하려 했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다시 거사를 모의하기 위해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노림리의 야학당을 거점으로 계획을 상의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