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문견(文見), 호는 괴천(槐泉). 아버지는 유증신(柳增新)이며, 어머니는 정선전씨(旌善全氏)로 전만추(全萬樞)의 딸이다. 유증서(柳增瑞)의 문인으로,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태학(太學)에 있을 때 논의(論議)와 문사(文詞)가 출중하여 대신인 채제공(蔡濟恭)이 천거하려 하였으나, 당로자(當路者)의 시기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유문룡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더욱 정진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정종로(鄭宗魯)에게 서면으로 『중용』을 질의하였고, 정박(鄭墣)·권중헌(權中憲)·유운우(柳雲羽)·손병로(孫秉魯)·노광리(盧光履) 등과 학문적으로 교유하였다. 유문룡은 사서(四書)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깊이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용학도(庸學圖)』·『주서발휘(朱書發揮)』·『대학도연의(大學圖衍義)』·『사서석의(四書釋義)』·『성리요해(性理要解)』·『근사록발휘(近思錄發揮)』·『제의집설(祭儀集說)』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지고 『괴천문집(槐泉文集)』 2책이 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