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간으로 김신국(金藎國) · 조성(趙誠) · 박로(朴로) 등을 탄핵하고, 그 뒤 부응교로서 공서파(功西派)의 영수인 이조판서 김류(金瑬)가 북인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삼으려는 데 반대하다가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왕을 찾아가 사도시정(司䆃寺正)에 임명된 뒤, 후금(後金)과의 화의가 잘못되었음을 상소하였다. 1629년 박정(朴炡) · 나만갑(羅萬甲) 등과 노서(老西)로 지목되고 공서를 공격하다가 가평군수로 좌천되다.
이어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김류 · 윤방(尹昉) 등 대신들의 무능과 안일을 비난하다가 수원부사로 또 다시 좌천되었으며, 이어 1631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 이귀(李貴)가 박지계(朴知誡)를 지평으로 추천하자, 대사간으로서 참판 이성구(李聖求), 좌랑 구봉서(具鳳瑞)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다. 1634년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숭 논의가 분분할 때 추숭에 적극 찬성해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이어 병조참지를 역임한 뒤 1636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 화의를 주장한 윤방 · 김류 등의 처형을 주장하다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된 뒤 대사성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어, 다시 윤방 · 김류 등의 전후 무사안일하고 반성하지 않는 행실과 김경징(金慶徵) · 이민구(李敏求)의 강도(江都) 방어 실패의 죄를 탄핵하였다.
그 뒤 대사헌이 되어 윤방이 종묘의 신주를 모독한 죄를 탄핵하고 자강책 10여 조목을 상소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여러 번 직언을 하다가 화를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계속해 밀고 나가 충직함이 인정되어 그 때마다 복직되기도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취헌소차(翠軒疏箚)』 3권 3책이 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포저집(浦渚集)』
- 『서계집(西溪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명곡유고(明谷遺稿)』
- 『약천집(藥泉集)』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선고(淸選考)』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