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전기 우군도총제, 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412년 1월 총제(摠制: 총제사)로서 개천도감제조(開川都監提調)를 겸하였다. 같은 해 7월 의흥부(義興府)를 개혁적으로 없애고 삼군별시위(三軍別侍衛), 응양위절도사(鷹揚衛節度使), 별사금제조(別司禁提調)를 설치할 때 별사금우변(右邊)제조에 임명되었다. 141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418년(태종 18) 6월 이전에 총제가 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시위 강화를 위하여 사도(司導)와 좌(左) · 우패(右牌)를 각각 별사엄(別司嚴)과 좌 · 우금위(禁衛)로 개편할 때, 좌금위삼번절제사(左禁衛三番節制使)에 제수되었다. 1429년(세종 11) 이전에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에 승직하였다. 1431년 7월 우군 총제를 거쳐 같은 해 8월 함길도순찰사로 파견되고, 곧 총제로 입조했다가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32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434년 6월 이전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같은 해 12월 중추사(中樞使)에 체직되었다. 1435년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자(陞資: 당하관이 당상관의 자품에 오름.)하면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436년 딸과 손자가 음행을 자행한 일로 인해 전일의 행실을 추궁받으면서 서흥(瑞興)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사면(赦免)되고, 1439년 4월에 고신(告身: 관직임명장)을 돌려받았으며, 곧 동지중추부사에 임용되었다가 죽었다.
학식이 부족하고 방자한 행동으로 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탁월한 무예와 전략으로 장기간 시위군을 지휘하면서 태종과 세종대의 왕권 안정에 기여했다. 시호는 황호(荒胡)이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구수동(九壽洞)에 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화류씨족보(文化柳氏族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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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아버지 : 『세종실록』 93권, 1441년(세종 23) 9월 12일. "동지중추원사 유은지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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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시호 황호 : 『세종실록』 93권, 1441년(세종 23) 9월 12일. "동지중추원사 유은지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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