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용(元用), 호는 사와(思窩). 유만화(柳萬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증후(柳曾垕)이다. 아버지는 유중탁(柳中鐸)이며, 어머니는 이재한(李再翰)의 딸이다.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박사·전적·예조좌랑·후릉령(厚陵令)·사직령(社稷令)·병조좌랑·지평·장령 등을 역임한 뒤, 1847년(헌종 13)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 때 당시의 폐정의 개혁을 주장하는 상소가 문제되어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851년에 현풍현감, 그 뒤 지평·부수찬·사간·수찬·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진시폐소(陳時弊疏)」에서 지도층의 무절제한 사치, 승진을 위한 뇌물행위, 군비의 허술함, 환곡(還穀)의 폐단 등을 지적하고 그 개혁을 주장하는 등 정치적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여가로 학문과 수신에 힘써 「자경(自警)」·「심물망도(心勿忘圖)」등을 썼으며, 자신을 반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저서로 『사와문집』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