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사원(四源), 호는 송은(松隱). 충청남도 천원(지금의 천안) 출신.
역사와 위인의 사적을 통하여 애국심을 길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심화되자, 이듬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3년 영주군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유장렬(柳漳烈)·한훈(韓焄)·강병수(姜炳洙)·김상옥(金相玉)·정진화(鄭鎭華)·이각(李覺) 등과 비밀결사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일본총독부의 요인과 친일분자를 몰아내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 무기를 구입하였다.
1915년 7월 대구에서 활동하던 박상진(朴尙鎭)·양제안(梁濟安)·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김경태(金敬泰)·김한종(金韓鍾)·엄정섭(嚴正燮) 등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로 개칭하였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신현대(申鉉大)·윤홍중(尹洪重)·신두현(申斗鉉)·김정호(金鼎浩)·권태진(權泰鎭)·임병한(林炳翰)·윤형중(尹瀅重)·김홍두(金弘斗)·윤치성(尹致晟)·이현(李鉉)·박성태(朴性泰)·기명섭(奇明燮) 등을 규합하여 다시 광복단으로 개칭하였다.
1917년 11월 총사령 박상진의 명령을 받고 채기중·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弼) 등과 같이 군자금모금에 협조를 거부하고 방해한 경상북도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우재룡으로 하여금 경상남도의 재산가 명단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가, 이들에게 광복단의 취지와 포고문을 발송하게 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힘을 쏟기도 하였다.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광복단의 활동이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1918년 1월 박상진·김한종·임세규(林世圭) 등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 뒤 가출옥되었으나 옥고로 얻은 병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