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발전도상에 있는 국가들은 선진제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자국의 학술·기술·문화 수준을 드높이기 위하여 젊은 영재들을 내보내서 선진 문물을 흡수해 왔다.
그러나 점차 세계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선진국·후진국을 구별하지 않고, 그 나라의 사회·경제·문화를 깊고 넓게 연구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건너가 문물을 배우는, 이른바 지역연구형 유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유학이 보편화되자, 연령도 이전의 일부 영재층에서 청장년층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선진국에서는 유학의 대중화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1997년 유네스코 교육통계에 의하면, 외국인 유학생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으로 44만 9700여 명이 재학하고 있으며, 프랑스 13만 9500여 명, 영국 9만 500여 명 등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1천 명당 유학생 수로 환산할 경우 스위스 170명, 오스트리아 105명, 프랑스 67명 등 유럽 대학들이 높은 순위를 점하고 있고,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16명에 이어 중국도 한국(0.9명)의 6배 가까운 다섯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가장 많은 유학생이 몰리고 있는 미국 내 전체 유학생은 중국이 4만 4381명으로 가장 많고, 계속해서 5위까지 아시아 국가가 차지하였다.
한편, 한국의 경우 1994년 교육부가 집계한 주요 국가별 유학생 현황을 보면, 미국 유학생이 전체의 52.9%인 5만 6345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본 1만 8479명, 독일 7,359명, 프랑스 5,835명, 중국 4,485명, 이탈리아 2,840명, 영국 2,325명, 호주 1,922명 등으로 전체의 93.5%가 이들 8개국에 집중되고 있다.
이제 유학생 교류는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의 일방적인 진출만이 아니라 선진국 상호간, 나아가서는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 등으로 일반화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특정한 분야가 발달된 지역으로 유학하는 다양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이웃 중국을 비롯하여 멀리 인도에까지 유학을 갔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공식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영류왕 5년(622)에 나오는 도당(渡唐) 유학생으로 이것이 유학의 효시이다.
이러한 기록 훨씬 이전에도 근접 국가간의 빈번한 인적·물적 교류가 이루어진 점으로 보아, 이국(異國)의 문물을 견문하거나 학습을 도입하려는, 이른바 유학에 해당되는 사례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당나라는 최고학부인 국학(國學) 진흥과 주변 국가에 대한 개방정책에 따라, 정관(貞觀) 14년(640)에 고구려·백제·신라의 학생들을 국학에 받아들였다.
이러한 수학 요청은 먼저 고대국가의 정치적 발전에 따른 삼국 자체의 유교적 정치이념 강화의 필요성과 함께, 당나라에 대한 일종의 외교적 수단이기도 하였다. 삼국의 대당(對唐) 유학생 파견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종결을 맺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보다 긴밀한 관계를 위하여 국학에 숙위학생(宿衛學生)이라는 왕족의 자제를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대당 접근책으로 이들을 정략적 담보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초기 숙위학생은 원칙적으로 왕족인 진골(眞骨)의 자제 중 문장력 등이 우수한 자를 선발·파견하였다. 그러다가 차차 육두품(六頭品) 계열의 자제들이 선발·파견되었으며, 728년(성덕왕 27)에 “국학 입학 요청이 허락되다.”라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본격적인 정규 유학이 정착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에서 “신라는 당나라와의 정치적 교섭 이후 왕자를 숙위로서 당나라에 머물게 하였고, 학생을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공부하도록 하였는데, 그 기간은 10년이 차면 귀국을 시키고 또 다른 학생을 파견하여 많을 때는 100여 명에 이르렀다.
도서 구입 등은 본국에서 부담하고 숙식은 당나라의 홍려시(鴻臚寺)와 공동 부담하였으며, 학생의 오고감이 계속 이어졌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비 유학생에 의한 장기간의 수학을 통하여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 밖에도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慧超)가 여행지에서 신라 승려들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많은 승려들이 구법(求法)을 위하여 끊임없이 해외로 진출하였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처럼 신라불교는 많은 유학승(留學僧)과 오교(五敎)의 개창(開創) 등으로 한층 발전할 수 있었다.
신라의 초기 도당 유학생은 왕족이 중심이 되었으나 차츰 신분적으로 그 제한이 낮아져 갔다. 후일에는 신라에서도 당나라의 음양학(陰陽學)인 천문·지리·역법 등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경덕왕 때에는 천문박사(天文博士)라는 특수 분야의 직제가 신설되기도 하였다.
대체로 이들 유학생들은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여 신라의 문화계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골품제가 지배하는 사회였기에 유학생 출신은 대체로 육두품이 담당하는 외직(外職)이나 지식층에 허용된 잡직의 범위 내에서 참여의 기회를 얻었다.
당나라의 정치·문화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던 데서 점차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와 같은 유학(儒學) 중심의 인재 발탁으로 변화가 나타난 것은 왕실의 세력기반이 구축되어 갔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유학생들은 강력한 골품제사회에서 지식인 관료가 활약할 수 있는 한계 때문에 당시의 폐쇄적 골품제를 비판할 수 있는 발전적 세력으로 변모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9세기 초부터 실시된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821년(헌덕왕 13) 김운경(金雲卿)이 최초로 합격하였으며, 그로부터 당나라 말기까지 합격자가 58명, 오대(五代)·양당(梁唐) 시기에 32명을 헤아린다고 하였다.
초기의 유학생들은 귀국 후 그런대로 예우를 받을 수 있었으나, 신라 말기에 정치 및 신분질서가 어지러워지자 이들에 대한 응분의 대접도 점차 소홀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학생 중 당나라에서 귀국하라는 지시를 거부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고, 도교나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당시 선종구산(禪宗九山)의 창시자는 거의 이들 유학생에서 비롯되었다.
후삼국의 혼란기에는 유학생 출신들이 주로 왕건(王建)의 막하에서 활약하였으며, 최치원(崔致遠)은 존왕사상(尊王思想)에 대한 유교정치의식을 제시하였고, 최언위(崔彦撝)는 왕건의 정치대강(政治大綱)인 「훈요십조(訓要十條)」의 기반을 제언하기도 하였다.
이들 고려시대의 유학생은 신라 말기와는 달리 정치권력과 밀착하여, 빈공 출신인 최광정(崔光廷)이 거란의 침략 가능성을 사전에 알려 광군사(光軍司) 설치에 앞장섰던 사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적극적인 정치 참여자로 바뀌었다.
유학생 파견은 송대(宋代)에도 계속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세종 때 명나라에 김도(金濤)를 파견한 것을 끝으로 7세기 이상 계속되던 해외유학이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항을 계기로 거의 4세기 만에 해외유학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정부는 개항에 따른 무비자강(武備自强) 추진책의 한 방편으로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중국에 들어와 있는 서구 과학기술 및 병기 도입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역설, 이의 제작 및 조작 학습을 위한 과학기술 학도들의 대규모 유학을 추진하였다.
학도 파견을 위한 교섭은 1879년 음력 7월부터 시작되었으며, 청나라측의 동의를 얻어 이듬해 7월 9일 「조선국원변내학제조조련장전(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鍊章典)」 4개조가 약정되었다.
이에 따라 학도를 보내면 톈진(天津)기기국(機器局)의 동국(東局)·남국(南局)에서 받아 학습하게 하며, 식비는 조선측이 부담한다는 등의 세부사항이 합의되었다.
이에 영선사(領選使) 김윤식이 인솔하는 학도 20명, 공장(工匠) 18명 등 총 38명의 사절단이 11월 17일 북경에 도착, 이듬해 톈진의 기기국에 분속되어 화약 및 탄약 제조법에서부터 자연과학과 외국어를 학습하였다.
당시 이들 유학생에 대한 평가는 부정과 긍정이 반반이었다. 38명 중 19명이 도중에 귀국하였으며, 체류 경비에 대한 송금 지연 등으로 모처럼의 집단 해외연수를 어렵게 만든 데다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생함으로써 실제 학습기간은 반 년 정도로 전원 철수하였다.
청나라에서 유학생을 철수한 것이 1차 유학정책의 좌절이기는 했으나, 이를 계기로 선진 과학기술 습득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각종 현대기계와 과학기술 서적이 도입되었고, 근대적 병기공장인 기기창(機器廠)이 북창(北倉)에 건립되어 가동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을 비롯하여 프랑스·영국과의 조약에서도 유학생 교류를 약정하게 되었고, 일본과의 접촉이 잦아지자 일본 유학이 급속히 확대되어 갔다.
박영효(朴泳孝)의 『사화기략(使和記略)』에는 임오군란 뒤 정부에서 박영효·서광범(徐光範) 등을 일본에 사절로 보낼 때, 학도 10여 명이 이들 수신사 일행과 동행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김옥균(金玉均)이 2차로 일본에 건너갈 때 신봉모(申鳳模)·변수(邊燧)·박유굉(朴裕宏) 등을 데리고 가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유학을 시켰다.
이후 김옥균이 일본에 포경권(捕鯨權)을 저당잡힌 자금으로 60여 명을 보낸 것을 비롯하여, 손병희(孫秉熙)가 일본에 망명할 때 동학(東學)의 자금으로 수십 명의 유학생을 데려가기도 하였다. 또 정부측에서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게이오의숙 등에 유학생을 많이 파견하였다.
이러한 유학생 가운데 서재필(徐載弼)·유길준(兪吉濬) 등은 구미까지 간 초기 유학생이 되었다. 이와 함께 유학생의 학습 영역도 다원화되어, 1901년에는 유도를 배우기 위해 8명의 학생이 일본의 강도관(講道館)에 유학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구미를 비롯한 여러 나라로의 유학이 활발히 추진되려는 추세를 보였으나, 1910년 국권 상실과 함께 구미 유학은 거의 동결되다시피 하여, 이 때부터 광복까지 일제강점기하에서의 유학은 일본으로의 유학이 주가 되었다. 1910년 당시 일본 유학생 수는 비공식 집계이기는 하나 2,000명 내외였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전의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의 청년 가운데 이용가치가 있는 자에게 각종 장학금을 주어 종주국으로 유학시킨 다음, 식민지의 관료나 예속 자본가로 길러 이용하려는 정책을 썼다.
식민지 출신의 유학생 중에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여한 정의로운 인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수는 민족의 고난을 외면하고 종주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는 사실은 일제하의 한국인 일본 유학생 출신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었다.
1945년의 광복은 유학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더욱이 남한은 미군의 진주로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미군정기에는 일부 인사에게 미국 시찰연수의 기회가 제공되었고, 극소수이기는 하나 미국 유학의 길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정부수립 후 6·25전쟁기인 1951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발간된 7월 13일자 『민주신보』에는 ‘처음 가는 미국 유학 육군장교단 용약 장도에’라는 표제 아래 육군장교단 미국 유학생에 대한 도미환송식을 국방부 주최로 12일에 거행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민주신보』 1952년 9월 10일자 보도에는 이전에 매년 100명씩 파견하던 유학생을 300명으로 증원할 것과, 유학 행선지도 미국뿐 아니라, 유럽 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중국 등으로 범위를 넓힐 것을 정부 부처간에 협의했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파견할 때 자연계 70%, 인문계 30%로 조정할 것과, 선발의 공정성 및 출국 수속을 신속하게 하기 위한 부처간의 책임 분담을 뚜렷이 하였다. 나아가서는 이미 파견된 유학생의 면학성과 등을 파악, 부실한 자는 즉시 소환하는 책임을 외무부가 관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렇듯 전란을 겪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가 재건을 위한 인재육성에 힘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계속적인 대규모 유학생 파견으로 그 경비인 외화 조달이 나중에 정부의 연간 외화수입을 능가하자, 몇 년 지속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식·비공식 과정을 통한 유학생 수는 계속 증가되어 갔다.
1953∼1971년까지 전세계 42개국에 1만 1355명이 유학하였으며, 그 중 미국 유학생이 전체의 87.6%를 차지하였다. 그 밖에 해외 훈련생의 경우도 1951년에서 1976년까지 1만4003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이 중 20% 이상이 미국에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교육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6·25전쟁이 끝난 1954·1955년에 유학생이 2배씩 증가하였다고 한다.
한편, 1955년에는 외국 대학에 유학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정부에서 파견하거나 국제협력에 따른 기술훈련계획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육부의 인정을 받도록 하는 「해외유학생규정」이 공포되었다.
이 규정에 따른 우리나라의 유학정책은 그 뒤부터 1978년까지 20년 동안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책상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었다.
① 자연과학계 전공자의 우선책이다. 1957년에 제정된 교육부령 「해외유학생에 관한 규정」에 자연과학계는 국내에서 대학 2년 수료만으로도 가능했으나, 인문계는 4년제 대학 졸업자라야 허용되었다.
또한, 매년 실시되는 해외유학자격고시에 자연계 대 인문계의 비율을 7:3 정도로 조절하는 방침이 상당 기간 적용되어 왔다. 이 정책은 자연과학이 외국어가 적게 요구된다는 이유 외에 자연계 인력 확보의 시급성을 고려하여 취해진 조처로 해석된다.
② 유학생의 질을 보장하여 유학의 효율성을 높이려 하였다. 유학생의 기초능력과 면학정신이 구비되었을 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③ 당시의 외환 사정으로 유학생 수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외환 사정이 호전되어 현재는 크게 문제시되고 있지 않으나, 문교정책상으로 우수한 학생을 외국에 갈 수 있게 하는 지도적 관리는 필요하다.
그러나 1979년부터는 해외 유학정책을 크게 완화하여 대학에서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쉽게 유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산업의 고도화에 따른 고급두뇌 인력이 크게 요구되어 지금까지 자비나 해외 장학금에 의존해 왔던 유학정책이 1977년에 처음으로 국비유학제도를 마련, 국내에서 대학 졸업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국내 대학에서 이수하기 곤란한 분야를 해외에서 수학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경비 일체를 정부가 부담해서 파견하게 되었다.
국비유학생은 교육부장관이 시행하는 국비유학생 선발시험에 의해 선발하게 되며, 매년 1회씩 시행되었다. 응시자격은 30세 미만인 자로 대학 졸업 또는 졸업예정자로서 출신 대학의 추천을 받아야 하며, 1·2차의 선발시험에 통과해 한다. 유학기간은 3년으로 하고, 특별한 경우에는 2년의 범위 내에서 연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이 수학한 뒤에는 귀국하여 정부가 지정하는 기관에서 유학기간에 상당하는 기간을 의무적으로 근무하게 하였다.
또한 국비 및 자비유학 외에 국고에서 지급하는 경비에 의하여, 외국의 교육기관·연구기관·연수기관·산업체 등에서 지식·기술 등을 연수하는 국비연수가 있다. 국비연수생의 연구기간은 6개월 미만이며, 교육부장관의 인정하에 1년 범위 내에서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편, 외국인 장학생 초청에 관한 사업도 확장 추진되었다. 이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고등교육기관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이들이 한국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국제간의 학술·문화 교류와 우호 증진을 도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초대 대상국은 주로 우리나라와 문화협정이 체결된 나라 또는 협정교섭국, 우리나라 장학생 초청 실적이 많은 나라 등이다.
전공 분야로는 인문·사회 및 자연과학 분야의 석사 또는 박사과정으로 교육기간은 1∼3년으로 하였다. 이 사업이 처음 시작된 1967년부터 1980년까지 14년 동안 1996명에게 장학금이 수여되었다.
그 후에도 1981년 22명, 1982년 11명, 1983년 12명, 1984년 14명, 1985년 13명, 1986년 18명, 1987년 13명, 1988년 10명, 1989년 13명, 1990년 19명, 1991년 14명, 1992년 24명, 1993년 15명, 1994년 26명, 1995년 41명, 1996년 53명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유학개방정책은 1980년대 이후 수학능력이 부족한 자들의 유학 증가 등 부정적인 현상이 나타남에 따라, 1983년에 「국외유학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자비유학 자격을 강화하고 유학자격심사위원회를 설치하는 한편, 국비유학제도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신설, 보완하였다.
학문 분야에 따라서는 외국에서 수학하여 일정 취득 학점을 그대로 인정하는 형태의 유학도 도입할 단계가 되었으며,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한 제반 여건을 충실히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