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합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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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조각의 가죽으로 만든 신[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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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여섯 조각의 가죽으로 만든 신[靴].
내용

화의 형태가 처음 보이는 문헌은 『집고도(集古圖)』에 수록된 오피화(烏皮靴)이다. 이것은 요즈음의 장화모양으로 되어 있고 화대(靴帶)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석명(釋名)』 석의복조(釋衣服條)에서는 승마용의 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후당마고(馬稿)의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에는 조무령왕(趙武靈王)이 처음으로 착용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요(靿 : 신목)가 붙어 있는 화로서 기마(騎馬)에 편리한 서호(西胡)의 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권1에도 활동에 편한 호복(胡服)에 남북조시대 이래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착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라다(原田淑人)의 『당대의 복식(唐代の服飾)』에 보면, “수·당의 제왕과 높은 관직의 신하가 오피육합화를 신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당서(唐書)』 거복지(車服志)에 의하면, 수나라 초기의 문제(文帝)는 자황문능포(赭黃文綾袍)에 오사모·절상건을 쓰고 육합화를 신었으며, 높은 관직의 신하도 통복(通服)에 육합화를 신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도다이사쇼소원(東大寺正倉院) 소장의 오피화를 수·당의 육합화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것은 장화 모양의 여섯 개의 가죽으로 봉합되었다. 화의 요에는 금동교구(金銅鉸具)가 구비된 화대가 달려 있어 착용 시에 이것으로 졸라매게 되어 있다.

신라에서 사용되던 화대의 재료로는 『삼국사기』 색복조(色服條)에 은문백옥(隱文白玉)·오서(烏犀)·유(鍮)·철(鐵)·동(銅) 등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화대의 귀금속 장식이 유행하였음을 알려준다.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복식금제조에 의하면, 이 화대의 귀금속 장식을 평인(平人)은 동·철만 사용하게 하였다.

이로 보아 화대가 달린 이 화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썼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에서 유목민들이 신었던 ‘가죽버선’이라 불리는 세 조각의 가죽으로 만든 버선 형태의 화가 육합화와 비슷한 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석명(釋名)』
『중화고금주(中華古今注)』
『몽계필담(夢溪筆談)』
「화제(靴制)」(조효순, 『한국(韓國)의 복식(服飾)』,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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