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돈암(遯菴).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본 뒤, 사모(紗帽)와 관복을 찢어버리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청주의 옥화대(玉華臺)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동문선』에 윤사석의 시 한 수가 전하고 있으며, 이이(李珥)의 행장에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은둔생활을 하는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용궁(龍宮)의 죽락사(竹樂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