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사헌부집의를 역임하였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를 목격하고 청주로 내려가 은거한 학자.
이칭
돈암(遯菴)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사헌부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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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 전기에, 사헌부집의를 역임하였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를 목격하고 청주로 내려가 은거한 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돈암(遯菴).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본 뒤, 사모(紗帽)와 관복을 찢어버리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청주의 옥화대(玉華臺)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동문선』에 윤사석의 시 한 수가 전하고 있으며, 이이(李珥)의 행장에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은둔생활을 하는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용궁(龍宮)의 죽락사(竹樂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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