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사헌부집의를 역임하였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를 목격하고 청주로 내려가 은거한 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돈암(遯菴).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본 뒤, 사모(紗帽)와 관복을 찢어버리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청주의 옥화대(玉華臺)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동문선』에 윤사석의 시 한 수가 전하고 있으며, 이이(李珥)의 행장에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은둔생활을 하는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용궁(龍宮)의 죽락사(竹樂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