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병조참의,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 때 대간(臺諫)으로부터 ‘성격과 능력상 피폐한 경성에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탄핵되었으나 중종의 옹호로 부임하였다. 1535년 사표(師表)가 될만한 유신이라 하여 사유(師儒: 성균관의 관직)에 선임되었다.
1538년 통례원좌통례로서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고, 그 상으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539년 참판의 가함(假銜: 외국에 임무를 띠고 수행할 때 현직 보다 한 단계 높은 관직을 임시로 받는 것을 일컬음.)을 띠고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듬해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르면서 한성부우윤에 제수되고, 곧 경연특진관을 겸대했으며, 1542년 공조참판으로 옮겼다. 1544년(중종 39)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판윤(判尹)에 제수되고, 1546년(명종 1)에는 공조판서에 발탁되었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중종실록』의 수찬(修撰)을 지휘하였다.
이 때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이기(李芑)에 당부(黨附: 뜻을 같이 하여 붙음.)해, “조광조(趙光祖)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사류(士類)의 모해(謀害: 모의해 해를 미침.)에 적극 참여하였다. 1553년 연로하다는 이유로 공조판서직을 사직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다.
1557년(명종 12) 윤원형(尹元衡)의 ‘연로훈신이니 가자(加資: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직에 오름)해야 한다’는 계청(啓請)에 따라 종1품 숭정대부에 올랐다가 졸하였다.
명종 초·중기까지 정치를 천단한 이기와 윤원형에게 아부하고, 아들 윤옥(尹玉)이 이기의 심복노릇을 해 장기간 공조판서에 재직하였다. 그러나 식견이 짧아 별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한다. 시호는 공호(恭胡)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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