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仲德)이며, 호는 율정(栗亭)이다. 국학대사성 문한사학(國學大司成文翰司學)을 지낸 윤해(尹諧)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윤수평(尹守平)이다.
일찍부터 글을 잘해 고모부 윤선좌(尹宣佐)를 따라 공부했고, 특히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능통하였다. 1317년(충숙 4) 9월에 등제해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에 선임되었다가 교감(校勘)을 거쳐 검열에 올랐다. 연경(燕京)에 머물던 충숙왕으로부터 강릉대군 왕기(江陵大君 王祺: 뒤의 공민왕)를 뒷날 후계자로 추대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1320년 우부대언에 임명되어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관장했고, 우대언(右代言)을 거쳐 충목왕 초에 나주목사가 되었다. 충목왕이 돌아가자 1349년 밀직이었던 이승로(李承老)와 함께 중서성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패하고 충정왕이 즉위하자 7월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11월 밀직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 4월 소를 올려 시사를 논했으나 윤허되지 않자 개성부윤으로 치사하였다. 근신 가운데 향악(鄕樂)을 원나라에 보낼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상소해 중지시켰다.
또 1357년(공민왕 6) 공민왕이 중 보우(普愚)의 건의대로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이제현(李齊賢)에게 궁궐 터를 축조하도록 명했으나 간하여 이를 막았다. 같은 해 6월 왕에게 『상서(尙書)』의 무일편(無逸篇),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 「최승로상서문(崔承老上書文)」을 강의하고 유학에 힘쓰도록 권하였다. 1361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더하여 치사하였으나 은퇴한 뒤에도 항상 치국의 길을 직언하였다. 1363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더했으나 이듬해 병이 나서 치사하고 금주(錦州: 금산)로 은퇴하여 산수를 즐긴 지 7년 되던 1370년 9월 세상을 떠났다.
효성이 깊고 항상 정직하며 검소하게 지냈다. 공민왕이 손수 진용(眞容)을 그려주고 율정이라는 호 두 글자를 해서(楷書)로 크게 써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율정집(栗亭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