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사정(士正), 호는 학곡(鶴谷).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이영련(李英璉)이며, 어머니는 참봉 한여구(韓汝龜)의 딸이다.
11세부터 주미곡(朱渼谷)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708년(숙종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임명된 뒤 학록 겸 직장, 박사 등을 거쳐 1713년 감찰을 지냈으며, 재직 중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1720년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자르는 효성을 보였다. 1723년(경종 3) 병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1727년(영조 3) 고산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윤헌주(尹憲柱)의 무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35년 문천군수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고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니, 군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경상도사와 사헌부장령을 거쳐 68세 때 특명으로 판결사에 임명되었다.
이격이 죽자 나라에서는 “증자(曾子)의 효도요, 백이(伯夷)의 청백”이라는 제문을 내리고, 유생 한집윤(韓集胤) 등의 상소에 따라 정려가 내려졌다. 쌍봉(雙峰) 향현사(鄕賢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학곡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