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초명은 이경조(李景祚). 자는 효석(孝錫). 아버지는 좌의정 이보혁(李普赫)이다. 정제두(鄭齊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35년(영조 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지평현감(砥平縣監)·담양부사를 역임하고, 1753년 충주목사로 있을 때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장례원판결사·동부승지, 좌·우승지, 병조참지·참의, 형조참의·대사간·한성부우윤·오위부총관·승문원제조·공조참판·도승지, 호조·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대사헌·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62년 아버지가 죽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인양군(仁陽君) 작위에 습봉(襲封)되었고, 1767년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추천으로 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부사가 되었다가 곧 예조판서에 특배(特拜)되었다. 비변사(備邊司)·사옹원(司饔院)·혜민서(惠民署)의 제조(提調)에 이어 1773년 수어사(守禦使)·판의금부사에 특배되었다.
1774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입사하였다. 1778년 정조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홍국영(洪國榮)의 누이 원빈(元嬪) 홍씨(洪氏)가 간택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였으나, 가례가 이루어지자 가례청당상(嘉禮廳堂上)의 자리에 있다가 곧 병을 이유로 체직(遞職: 다른 자리로 옮김)하였다. 7월에 명릉(明陵)의 봉심(奉審)을 게을리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