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덕로(德老). 판운 이사관(李士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인장(李仁長)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 이수유(李守柔)이며, 어머니는 홍사수(洪士壽)의 딸이다. 부인은 이소종(李紹宗)의 딸이다.
1489년(성종 20) 진사로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91년 정언(正言)에 임명되고,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종친부 전첨(典籤)을 거쳐 1504년 사간(司諫)에 올랐다.
1506년(연산군 12)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가함(假銜: 외교사절로 파견시 명예로 한 품계 올려받고 임무를 수행하는 일)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오고, 곧 정3품 통정대부에 승자하였다.
1506년(중종 1)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발탁되고, 다음 해 이과(李顆) 등의 모역사 추국에 참여한 공로로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면서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르고 행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508년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고, 다음해 승려를 공궤하고 청탁을 받고 결송(決訟)한 일로 파직되었다. 뒤이어 “장(杖) 100, 유(流) 3000리”에 논죄되었으나 중종의 옹호로 용서를 받았다.
151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파견되고, 경주부윤(慶州府尹)에 교체되었다. 1514년 우윤(右尹)과 좌윤을 지내고 다음해에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1517년에 공신회맹(功臣會盟) 때에 받은 대가(代加: 품계를 올려 줄 사람을 대신해 일정한 친족관계에 있는 자에게 품계를 올려주던 제도)를 사위에게 준 일로 파직되었다.
1518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다음해 연안(延安) 도호부사를 거쳐 1520년(중종 15) 동지중추부사로 중앙에 돌아왔으며, 곧 겸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總管)으로 교체되었다. 중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장기간 재상직에 있었지만 별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