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3년(숙종 39) 그의 의술이 자못 신기하다는 소문이 나자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의 추천으로 양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그를 말을 보내어 불러들였다. 경종 때에는 도인승기탕(桃仁承氣湯)·구선남극단(癯仙南極丹) 등의 약을 여러 차례 지어 올렸는데 이들 약은 독성이 강하였다.
1724년(경종 4) 광흥창봉사로 있으면서, 왕의 병환으로 임시 설치한 의약청(議藥廳)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진찰시에 여러 번 불참하거나 지각을 하였으며 성품이 경거망동하고 불성실하였으므로 벼슬을 삭탈당할 뻔하였다.
경종이 죽을 때에도 여러 의원들과 함께 의약청에서 어떠한 약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논의하였으나 다른 의원들과 의견 대립이 잦았다. 결국 영조 즉위 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