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기주(李箕疇). 자는 여구(汝九), 호는 직재(直齋).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이숙(李塾)이며, 어머니는 군수 송현(宋鉉)의 딸이다. 이지렴(李之濂)·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학명이 높았으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다가, 47세 때인 1687년(숙종 13)에 학행으로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천거, 임용되었다. 1689년(숙종 15) 사포서별검(司圃署別檢)에 전직되었으나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해 스승인 송시열이 제주로 유배가게 되자, 동문 40여 인과 함께 이를 변론하다가 죄를 얻어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5년간 후진교육을 하다가 1694년에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로 복직되었다. 이듬해인 1695년에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로 승직되었으나 사은만 하고 사퇴하였고, 이듬해 서연관(書筵官)·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97년에 통천현감과 청풍부사를 잠시 역임하였다가 이듬해 장령에 전임되자, 인주치도(人主治道)에 관한 소만 올리고 사퇴하였다. 그 뒤 연풍(延豊)에 내려가 문산(文山)에 수락정(壽樂亭)을 세워 그곳에 살면서, 권상하(權尙夏)와 함께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때때로 화양동 등 사문(師門)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소일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번 집의에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자성편(自省編)』·『직재집』 등 10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