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합주(陜州)이다. 말년에 이름을 몽고식으로 고쳐 이첩(李帖)이라 하였다. 우복야 한림학사 승지(右僕射翰林學士承旨)를 지낸 이순목(李淳牧)의 아들이며, 형제로는 이신손(李信孫)·이의손(李義孫) 등이 있다. 또한, 아들 이설(李偰)은 충숙왕 때 찬성사에 올랐으며, 딸은 충렬왕 때의 권신이던 송분(宋玢)의 아들 송인(宋璘)에게 출가하였다.
처음 관직에 나간 경로는 확인되지 않으나, 1268년(원종 9) 임연(林衍) 등이 김준(金俊)을 제거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후 어사잡단(御史雜端)과 경상·전라·충청도의 안찰사(按察使)를 지냈다. 1279년(충렬 5) 판도총랑(版圖摠郎)으로서 동경유수(東京留守)에 부임하였는데, 때마침 일본 정벌을 독려하기 위하여 행차하였던 충렬왕에게 시종을 잘하여 부윤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1285년 경상도 왕지사용별감(王旨使用別監)으로 있으면서 수탈을 과중히 하여, 그것으로써 왕의 총애를 얻어 곧 위위윤(衛尉尹)에 초수(超授)되었다. 1291년 내료(內僚)에게 청탁하여 승지가 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같은 해 8월 서북면지휘사로 나갔다.
그 뒤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거쳐 1296년 2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됨으로써 재추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하여 1300년 4월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으며,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여 1301년(충렬 27) 7월 세상을 떠났다. 본인과 처 유씨(庾氏)의 묘지명이 남아 있다. 시호는 장숙(莊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