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전라도관찰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백길(伯吉)
포암(蒲菴)
이칭
완녕군(完寧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47년(인조 25)
사망 연도
1689년(숙종 15)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전라도관찰사|형조판서|병조판서
관련 사건
경신대출척|기사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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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전라도관찰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길(伯吉), 호는 포암(蒲菴). 이유록(李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여(李正輿)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이민적(李敏迪)이며, 어머니는 황일호(黃一皓)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세평이 있었다. 시재가 뛰어나 당대의 시인 김창흡(金昌翕)과 명성을 다투었다. 1672년(현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80년(숙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 정언으로 임용되고 서인에 가담하였다.

같은 서인 김석주(金錫胄) · 김익훈(金益勳) 등이 남인 허견(許堅)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경신대출척에 가담하여, 남인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워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으로 책록되고 완녕군(完寧君)에 봉해졌다. 1681년 사간이 되고, 그 뒤 홍문관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8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그 곳에서 주조하는 주전(鑄錢)을 감독하였다. 1685년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1688년 윤세희(尹世喜) 등의 탄핵으로 삭주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 때 사사되었다가 뒤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문장과 시재가 뛰어난 석학이었으나, 당쟁에 깊숙이 관여한 탓으로 유배지에서 비명의 최후를 마쳤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연천집(淵泉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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