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길(伯吉), 호는 포암(蒲菴). 이유록(李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여(李正輿)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이민적(李敏迪)이며, 어머니는 황일호(黃一皓)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세평이 있었다. 시재가 뛰어나 당대의 시인 김창흡(金昌翕)과 명성을 다투었다. 1672년(현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80년(숙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 정언으로 임용되고 서인에 가담하였다.
같은 서인 김석주(金錫胄) · 김익훈(金益勳) 등이 남인 허견(許堅)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경신대출척에 가담하여, 남인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워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으로 책록되고 완녕군(完寧君)에 봉해졌다. 1681년 사간이 되고, 그 뒤 홍문관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8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그 곳에서 주조하는 주전(鑄錢)을 감독하였다. 1685년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1688년 윤세희(尹世喜) 등의 탄핵으로 삭주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 때 사사되었다가 뒤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문장과 시재가 뛰어난 석학이었으나, 당쟁에 깊숙이 관여한 탓으로 유배지에서 비명의 최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