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자성(子省).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6대손이며, 강양정(江陽正) 이견손(李堅孫)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효언(李孝彦)이고, 아버지는 이경흠(李景嶔)이며, 어머니는 우승준(禹承俊)의 딸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학록으로 초사(初仕)하였으며, 그해 함경북도평사가 되었다. 1599년 전적(典籍), 이듬해 이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1604년 함경도도사에 이어 북청판관이 되었다.
1606년 충청도도사, 이듬해 경상도도사를 지낸 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는 헌납·지평·부교리를 역임하고, 이듬해 세자시강원보덕·장령 등을 차례로 지냈다. 1610년 사간이 된 뒤 집의·전한·응교 등을 거쳐, 1612년에는 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한 뒤, 이듬해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이성(李惺)[개명은 李忄+省]은 이산해(李山海)·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대북파의 당여(黨與)로서, 선조말 광해군을 대신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던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의 옥사에 깊이 관여하여, 1613년에 정운공신(定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하여졌다.
이어서 1614년 대사헌을 거쳐,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어 수선도감제조(修繕都監提調)를 겸하였으며,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사건을 추국한 공으로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반역죄로 참수되었으나, 1627년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