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고(子固). 아버지는 성종의 4대손 영천군 이정(靈川君 李侹)이며, 어머니는 상주 김씨(尙州金氏)로 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의 딸이다. 아내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인조의 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이복동생[孽妹]이다.
어려서부터 국량이 탁월하고, 비단옷 같은 화려한 의복을 입지 않았으며, 의지가 강하고 정의심이 넘쳐 고인(古人)의 풍도가 있었다 한다. 처음 진원부수(珍原副守)를 제수받았으며, 광해군 때 반역을 꾀한 신하의 죄를 다스렸다. 또한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이 대두되었을 때는 나이가 어렸으나 의연하게 나서, 정도를 주장하다가 몇 번이나 화를 입을 뻔하였다.
인조반정 후 특별히 품계를 올려 받았고, 1635년(인조 13) 인열왕후가 죽자 향관(享官)으로서 혼전(魂殿)을 지켰다. 병자호란 때는 왕실의 신위를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 때 한방에 거처하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시국에 대한 대책을 묻자 끝까지 적과의 화친을 반대하고 사신을 남한산성에 보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봉림대군의 명으로 강을 건너 간신히 행재소에 도착해 대군의 서찰을 전달하였다. 그 때 형 상원군 이상국(祥原君 李相國)이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남문에서 죽고, 또 어머니와 아내 및 형수도 그곳에서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 상(喪)을 받들어 장사를 지내고, 수원의 별장에서 상주 노릇을 하며 몸소 농사를 지어 제수를 마련하였다.
상을 마치자 1635년의 혼전에 대한 노고로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올라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졌다. 1640년 봉림대군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와 인조에게 고하기를 “진원군 일가의 절조있는 죽음은 신이 목도했으니 정문을 세워 표창해야만 합니다.”라고 해 모두에게 정문이 내려졌다.
그 뒤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항상 때묻은 베옷을 입고 살며 대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한다. 인조가 승하하자 또 혼전향관(魂殿享官)이 되어 중의대부(中義大夫)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