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기지(器之). 아버지는 진사 증이조판서 이계양(李繼陽)이며, 어머니는 영양김씨(英陽金氏)로 부사직 김유용(金有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질로 동생 이우(李堣)와 함께 학문에 정성을 쏟았다. 문소김씨(聞詔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인인 예조정랑 김한철(金漢哲)은 일찍 죽고 그 집에 모아놓은 책이 아주 많았다. 장모 남씨(南氏)는 사위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 책을 모두 물려주었으므로 이식은 고경(古經)과 백가(百家)의 연구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나는 밥 먹을 때에도 글과 함께, 잠 잘 때에도 글과 함께, 앉아서도 글, 길을 걸을 때에도 글이었다. 글이라면 한시 반각도 마음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이같이 유유히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이래서야 어찌 능히 다음날 성취되기를 바라겠느냐.” 라고 하면서 자제를 훈육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39세로 죽었다. 이식의 공부하는 기풍과 자제훈육은 아들 이황(李滉)으로 하여금 크게 성취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1544년(인조 즉위년) 5남 이해(李瀣)가 귀하게 되어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고, 1568년(선조 1) 7남 이황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가증되었다. 청계서원(淸溪書院)·계현사(啓賢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