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이백경(李伯卿)이었으나, 이름의 음(音)이 정종의 휘(諱) 경(曔)과 비슷하다 하여 이저(李佇)로 개명하였다. 그 뒤 그 이름 또한 세자(양녕대군)의 휘 제(禔)와 음이 비슷하여 또다시 이애(李薆)로 개명하였다. 영의정이며 개국·정사공신(開國定社功臣)인 이거이(李居易)의 아들이다. 태조의 맏딸인 경신공주(慶愼公主)의 남편이다.
1398년(태조 7)에 아버지와 함께 이방원(李芳遠: 뒤의 태종)을 도와 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어 상당후(上黨侯)가 되었고, 영완산부사(領完山府事)로 있으면서 사병(私兵)을 모으고 부도(不道)한 언동을 한 죄로 1400년(정종 2) 사장(私莊)에 안치되었다가 풀려났다.
1401년(태종 1)에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02년에 겸판승추부사(兼判承樞府事)·의정부찬성사가 되었고, 1404년에 아버지 이거이의 죄로 이애도 함주(咸州)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천·임강(臨江) 등지로 옮겨졌다가, 고향인 진천(鎭川)에 살도록 자원안치(自願安置)되었다. 그 뒤 1424년(세종 6)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경숙(景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