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라 ()

인물
일제강점기 때, 평양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며 여성계몽에 힘쓴 교육자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이애일라(李愛日羅), 이심숙(李心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94년(고종 31)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서울
관련 사건
3·1운동
정의
일제강점기 때, 평양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며 여성계몽에 힘쓴 교육자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본명 이심숙(李心淑), 이명은 이애일라(李愛日羅)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4년(고종 31) 1월 7일 서울에서 시종을 지낸 이춘식(李春植)의 셋째딸로 출생하였다. 1912년경 이화학당(梨花學堂) 중등과를 졸업한 후 충청남도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여선교사 샤프(Mrs. Sharp)의 중매로 같은 학교 교감 이규갑(李圭甲)과 결혼하였다. 결혼 뒤에도 영명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남편과 함께 여자야학교도 설립하여 여성계몽에 노력하였다.

이후 평양기독병원의 전도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이주하여 정진소학교(正進小學校)와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에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구금되었다.

석방 후 남편이 있는 서울로 와서 여성비밀결사인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에서 기독교 여성들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 다시 체포되었는데, 이때 일본헌병이 백일 된 갓난아이를 바닥에 던져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석방 후 남편을 찾았으나 이규갑이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만나지 못하고 공주로 왔다가 다시 연행되어 남편의 거처를 대라며 고문을 받았다.

이후 충청남도 천안의 양대여학교(良岱女學校) 교사로 근무하다 남편이 있는 러시아로 망명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함경북도 웅기에서 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중 생명이 위독하게 되자 석방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1921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남편을 만난 몇일 후 1922년 9월 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 감리교 여선교회의 역사』(이덕주,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전국연합회, 1991)
『조국을 찾기까지(하)』(최은희, 탐구당, 1973)
「일제강점기 이규갑·이애라 부부의 민족운동」(김승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5)
집필자
한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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