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학성(鶴城). 호는 학파(鶴坡). 원래 울산군의 기관(記官) 출신인데, 1396년(태조 5) 왜적에게 잡혀간 지울산군사 이은(李殷) 등을 시종한 공으로 아전의 역에서 면제되고 벼슬을 받았다.
1400년(정종 2) 어린 나이로 왜적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청해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을 따라 일본의 삼도(三島)에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1401년(태종 1) 처음으로 이키도[壹岐島]에 사신으로 가 포로 50명을 데려온 공으로 좌군부사직에 제수되었다.
그 뒤 1410년까지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왕래하면서 포로 500여 명을 찾아오고, 벼슬도 여러 번 승진해 호군이 되었다. 1416년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1419년(세종 1) 중군병마부수사(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1422·1424·1428년에는 각각 회례부사(回禮副使)·통신부사 등으로, 1432년에는 회례정사(回禮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런데 당시 부사였던 김구경(金久冏)이 세종에게 사무역(私貿易)을 했다고 상계(上啓)해 한 때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으나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한 뒤 대마도경차관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다. 1443년에는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자청해,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가 되어 다녀온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승진하였다. 조선 초기에 사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것이 모두 40여 차례나 되었다 한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 『학파실기(鶴坡實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