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으로 전하는 자료를 통해 진화(陳澕)·손득지(孫得之)·이백순(李百順)·이규보(李奎報)·이인로(李仁老)·최자(崔滋) 등과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보한집』에 “이윤보가 처음 과거에 합격하였을 때(李允甫初登第時)”라고 하여 과거에 합격한 사실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윤보에 대한 호칭을 ‘사관(史官)’이라고 한 사실로 보아 사관의 어느 직임을 맡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사관의 관원은 대개 다른 직책과 겸임한다. 그러므로 다른 자료에서 그를 ‘봉산(蓬山 : 한림원을 가리키는 말)’으로 부르는 것을 통해 한림원의 직책을 함께 맡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가 이윤보는 “영위한 재주로 봉산의 관서에 있으면서 일찍이 역사를 편수하여 만세에 전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라고 말한 사실은 이것을 뒷받침한다.
진화의 전기(傳記)인 「매호공소전(梅湖公小傳)」에 의하면 “강종(康宗) 임신년에 진화가 손득지·이윤보 등과 함께 사륜[絲綸 : 조칙(詔勅)의 글]을 관장했다.”고 한 점으로 보아 1212년(강종 1)에 사륜의 직임을 맡았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규보가 거제에 부임하는 이윤보를 전송하는 편지를 쓴 것으로 보아 사관을 맡은 이후에 거제의 지방관으로도 나갔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동관(東館)으로도 불렸는데 동관이 한나라 궁중의 서고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으로 보면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직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생토록 두보의 시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때때로 두보의 시구인 “干戈送老儒(간과송노유 : 전쟁 중에 늙은 선비를 떠나보낸다)”라는 구절을 읊조려 감상했다. 그리고 이 구절은 표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의미가 매우 간절해 보통사람은 지을 수 없는 시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윤보의 작품으로는 이규보의 「국수재전(麴秀才傳)」을 본떠 게를 의인화한 「무장공자전(無腸公子傳)」이 있다. 이규보가 이것을 보고 매우 칭찬하고 여러 문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요즈음 글 잘하는 사람을 얻었으니, 이윤보는 진짜 훌륭한 사관의 재질을 가졌다.”라고 늘 칭찬했다고 한다.
이 밖에 진화와 옥당에서 숙직하면서 지었다는 「유월궁편(遊月宮篇)」이 『보한집』에 전한다. 이규보가 이윤보의 시 끝에 쓴 글을 보면, “나의 벗 이윤보가 일찍이 쓴 시·부와 잡저 50여 편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보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50여 편은 분량이 많지는 않으나 스스로를 천거하는 일종의 문집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윤보는 학식이 매우 정교하고 널리 알아 시와 글은 모두 옛일을 바탕으로 했었다고 한다. 임춘(林椿)과 더불어 간결하고 우아하며, 정교하고 빼어났다는 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