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이광하(李光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집(李㙫)이다.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주진(李周鎭)이며, 어머니는 민진원(閔鎭遠)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남평현감을 지냈으며, 1759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교리가 되고 1764년에 사직이 되었다. 그 이듬해 대사헌으로 한후락(韓後樂)을 신구(伸救)하려다가 왕의 분노를 사 강화유수로 전직되었다.
1767년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강화유수로 있을 때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탄핵을 받아 삭녕군수로 좌천되었으며, 뒤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177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대사헌 정광충(鄭光忠), 대사간 이담(李潭) 등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775년에 판중추부사로 왕세손에게 국정을 대행시키는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지지파인 서명선(徐命善)을 도운 공으로 정조가 국정을 대리하게 되면서 좌·우의정이 되었으나, 조영약(趙榮約)에 관한 일로 임금과 대좌할 때 대신의 체모에 어긋나는 언행이 있다 하여 면직되었다.
1777년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020권을 구득하여왔다. 그 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다시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으로 있다가 1780년에 사직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