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전판관이었다 해임되어 있던 중 왜군이 평양성을 향하여 공격하자, 백의(白衣)로 일진(一陣)을 지휘하였다. 성이 함락되어 군사들이 물러갈 때 홀로 남아서 뒤를 막아 군졸들의 피해를 막았는데 그 공으로 다시 평양부판관이 되었다.
그 뒤 평안도별장을 거쳐 1601년 온성부사로 우위장(右衛將)이 되어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였다. 전라좌수사·제주목사, 행호군(行護軍) 등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전라병사가 되었는데 파총(把摠) 최홍윤(崔弘潤)을 장살(杖殺)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619년 주사청(舟師廳)이 설치되자 주사대장이 되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경상우병사로 재직 중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숨어 있다가 경상우도선유어사(慶尙右道宣諭御史) 이유달(李惟達)에 체포되었다. 1624년(인조 2) 권력자의 비호 아래 백성을 침탈하여 많은 재물을 축재하였다 하여 군문(軍門)에 효시(梟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