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의백(宜伯).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한양군(同知中樞韓陽君) 이흥준(李興俊)이고, 아버지는 장령(掌令) 이흡(李洽)이며, 어머니는 여흥 이씨(驪興李氏)로 예조판서 이우직(李友直)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고 이어 감찰로 전임되었다. 그 뒤 연해(沿海) 지역인 보령현감으로 발탁되었으나, 이 무렵은 임란 왜군이 겨우 철수한 때라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광해군 혼정(昏政) 때에는 출사하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앞서 정사(靖社)의 밀모에 가담해 반정 후 통정(通政)으로 승진하고 명천부사에 제수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후 전라좌수사로 승진하였다.
이어 인동부사로 전임되고, 1630년(인조 8) 한천군(韓川君)으로 봉해졌으며, 공청병마절도사(公淸兵馬節度使)·김해부사, 전라병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황해·평안·함경도 등의 병사를 거쳐, 1635년 공청병마절도사로 다시 부임해 그곳에서 병자호란을 맞았다.
적의 변란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기 위해 급히 임지 부근의 속오병(束伍兵) 수 천명을 겨우 모아 출전을 서둘렀다.
가사를 동생에게 맡기고 부인에게 흰 명주로 행전(行纏: 바지·고의를 입을 때 정강이에 꿰어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을 만들게 해 푸른 비단으로 바지 속 양 다리에 동여매니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묻는 말에 “전투에 임하기 전에 사생을 알 수 없는데, 후일 이것으로써 알아차리게 함이다.”하고 결연히 고군(孤軍)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하였다.
광주(廣州) 부근 죽산에 당도해 다음 날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전봉장 이차형(李次衡)·이근영(李根永)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고 중과부적이 되자, 영남 근왕병(嶺南勤王兵)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다시 진격하였다.
경상좌절도사 허완(許完)과 우절도사 민영(閔栐)의 군과 함께 광주 쌍령에 정족(鼎足)으로 진을 치고, 먼저 공격해온 적과 치열한 접전 끝에 아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무너지자, 비장(裨將)의 피신 권유를 물리친 채 살아남은 노비 축생(丑生)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허완·민영 등 양 절도사도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후일 이들의 공을 가상히 여겨 이의배 부자 및 허완·민영 등 양 절도사, 노비 축생을 모두 정려하였다. 그리고 이의배는 처음에 병조판서로 추증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승격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