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선(子宣). 종실 해령군(海寧君) 이급(李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천정(光川正) 이정(李渟)이다. 아버지는 선조의 현손 평원군(平原君) 이표(李標)이며, 어머니는 송응조(宋應趙)의 딸이다.
1761년(영조 37) 인일제에서 차석을 차지하여 회시에 바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은 뒤 그 해 정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1759년 관학유생으로서 누차에 걸쳐 상소하여 조헌(趙憲)·김집(金集)의 문묘 종향(從享: 문묘에 배향하여 신위를 모심.)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 1763년(영조 39)에 시강원 설서가 되고, 1763년(영조 41)에는 정언, 1769년에는 지평이 되었으나 조참(朝參: 왕의 친림 하에 조신들이 한 달에 네 번 찾아 뵈는 일)에 늦었다는 이유로 이양수(李養遂)·정창순(鄭昌順)·심관지(沈觀之) 등과 함께 북관(北關)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풀려났다.
1770년에는 다시 지평이 되었고, 다음해 부교리 재임시에 사간 이적보(李迪輔)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771년에는 수찬이 되었으며, 그 해 삼사에서 합계하여 여선형(呂善亨)과 은언군(恩彦君)을 왕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할 때는 정언으로서 합계에 참여했다.
이후 10년 이상 동안 조정을 떠났다가 1783년(정조 7)에 대사간으로 기용되어, 1784년에서 1787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대사간을 역임했다.